매일신문

[데스크칼럼] 21세기에 살고 있지만…

80년대에는 난해한 사회과학 용어가 난무했다. 한국사회를 분석하는 틀이라며 주요 모순, 부차적 모순 같은 말이 대학생들 사이에서 술술 쏟아져 나왔다.

민족문제와 계급문제중 무엇을 우선 순위에 두느냐에 따라 그룹이 나눠지고 친소관계가 갈리기도 했다. 얕은 지식에 기대 '나는 이쪽, 너는 저쪽'이라며 갑론을박하던 모습이 심심찮게 보였다. 지금 같으면 그냥 웃고 넘길 일이지만 당시 열정으로 가득했던 젊은이에겐 꽤 심각한 문제였던 것 같다.

예전 경험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우리 사회에서 가장 큰 문제점이 무엇일까라는 생각을 가끔씩 하게 된다.

비판의 뭇매를 맞고 있는 노무현 대통령 일까, 갈수록 벌어지는 서울과 지방간의 격차, 자질낮은 정치인들의 행태 일까, 경제불황, 대졸실업자, 빈부격차, 노사, 교육소외 문제 같은 걸까. 물론 정답은 없다. 누구나 자신의 환경이나 세계관에 부합되는 나름의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그 답을 어저께 인터넷에서 찾을 수 있었다. 여성가족부 해체 서명운동과 한국여성민우회의 여성호칭(며느리, 올케, 도련님, 아가씨)바꾸기 논란 등을 둘러싼 수많은 글들을 통해서다.

거기에는 남성과 여성의 역할, 가족 관계, 전통과 현대, 이기주의·피해의식 같은 우리 가까이에 내재된 모순이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주제나 글 내용을 볼때 사회활동층인 20~40대에 의해 주도되고 종래에는 전혀 볼 수 없던 사회현상이니 만큼 그 파괴력도 엄청났다.

여성가족부 해체를 주장하는 사이트에는 순식간에 10만명 이상이 서명했고 나아가 '100만명 서명운동' '남성권익보호당' '남성협' 같은 비슷한 사이트들이 줄줄이 생겨나고 있다. 여성가족부 간부 상당수가 졸업한 특정 여대를 비하하는 사이트도 갑작스레 각광받는가 하면 한국여성민우회 사이트에는 호칭 바꾸기 캠페인에 반대하는 남성들의 항의성 댓글이 폭주하고 있다.

웃지못할 상황은 남성은 남성대로, 여성은 여성대로 자신들의 불만을 과감하고 적나라하게 내뱉고 있으며 갈수록 그 정도가 심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일부 남성 누리꾼은 여성가족부가 게임 테트리스(성교 연상)금지와 과자 조리퐁(여성 성기 연상)판매금지, 주기도문(아버지 문구)개정 같은 정책을 시행하려 한다며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루머를 퍼트리고 있다. 한 여성은 '돈도 우리집이 훨씬 많은데 우리집은 왜 시댁의 종인가'라는 제목으로 "신랑의 동생들이 도대체 뭐길래 존대하면서 떠받들어야 하느냐. 정말 억울하고 분하다. 내가 여성으로 태어난 죄다"는 글을 올렸다.

남성들은 적대적인 여권주의로 인해 큰 피해를 보고 있다고 했고 여성은 사회와 가정에서의 불평등으로 여전히 차별을 받고 있다고 했다. 상대방의 입장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거나 인정하려는 모습은 아예 없다. 하나의 글이 올라오면 여러명이 달려들어 처음에는 논리적인 반론을 하다가 나중에는 욕설을 퍼붓거나 '이민을 떠나라'고 비아냥되는게 정해진 수순이다. 철없는(?) 10대의 악성댓글과 다를게 없다.

우리 사회의 갈등해결 방식이 그래왔듯 서로 평행선만 달릴 뿐, 양자의 접점 같은 것은 아예 찾기 어려운 것 같다. 인터넷에서 일어나는 남성과 여성의 갈등은 실제 가족관계에 그대로 옮겨갈 개연성도 높지 않겠는가.

여기에서 우리가 지금까지 전통적 사고와 시대흐름을 무엇 하나 제대로 융합시키지 못했음을 알게 된다. 옛것과 새것을 조화시키려는 노력이나 이를 합의하려는 자세 조차 전혀 돼있지 않다. 섞고 버무리는 '비빔밥' 한그릇 만들지 못하는 것만 봐도 우리 사회의 기반이 얼마나 취약한지 잘 알수 있다. 우리 몸은 21세기에 있는데 의식과 사고는 예전 그대로라고 한다면 과장인가. 이게 바로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점이 아닐까.

세계는 핑핑 숨가쁘게 돌아가는데 우리끼리 차분하게 해결하기 보다는 소모적이고 공격적인 것에 지나치게 열중하는 세태가 걱정스럽다.

박병선 기획탐사팀장 lala@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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