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강산에 울려퍼진 '찔레꽃'
그해 세밑, 금강산의 겨울은 추웠다. 구룡연과 옥류동 계곡을 쓸어 내려오는 찬바람은 볼을 도려낼 듯하였다. 아니 그것보다도 눈초리 매서운 인민군 보초병, 헐벗은 북 산하, 자신의 덩치보다 큰 나뭇단을 등에 지고 가는 북한 아낙네의 지친 걸음걸이, 바퀴 정렬이 너무도 불안해 보이는 소달구지의 삐걱거림…. 이런 눈물겨운 정경들이 내 마음을 더욱 으스스한 추위에 떨게 하였다.
어두컴컴한 금강산호텔 적막한 로비에서 커다란 벽화를 둘러보고 있는데,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노랫소리를 찬찬히 더듬어 갔다. 작은 식당이었다. 노래방 모니터 앞에 서서 혼자 애처로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있는 북측 여성 복무원의 모습이 보였다. 가만히 들어보니 저 엄혹하던 일제말 암흑기, 태평레코드사에서 발매했던 백난아의 노래 '찔레꽃'(김영일 작사, 김교성 작곡)이 아닌가. 한 순간 가슴이 꽉 메어 오고, 눈물이 왈칵 솟구칠 것 같았다. 그녀의 노래 1절이 끝나기를 기다려 2절 부르기를 자청했다. 그녀는 선뜻 마이크를 건네주었다. 북녘 아가씨의 노래에 이어 남녘 땅 한 사내의 노래가 금강산 골짜기에 울려 퍼졌다. 다시 반복으로 나오는 반주에 맞춰 남과 북이 혼성합창으로 이끌었다. 그날 밤엔 흐린 밤하늘 구름 사이로 파르르 떠는 별 떨기도 보였다.
그런데 새벽부터 축복처럼 엄청난 눈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튿날 날이 밝자 금강산 자락은 온통 황홀한 눈 천지였다. 삼엄한 비무장지대를 통과해 내려오면서 내 입에서는 마치 아쉬운 미련이라도 풀어보려는 듯 '찔레꽃'의 한 소절이 나직한 웅얼거림으로 흘러나왔다. "자주고름 입에 물고 눈물에 젖어 이별가를 불러주던 그리운 동무야" - 이동순(시인'영남대 교수)
◇ 첫사랑 여학생이 불러준 '동심초'
추억의 노래라면 '동심초'가 떠오른다. '꽃잎은 하염없이 바람에 지고 만날 사람은 아득타 기약이 없네. 무어라 맘과 맘은 맺지 못하고 한갖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가사의 애절함도 애절함이거니와 아주 개별적이고 특별한 경험이 있기에 이 노래를 가슴 속에 깊숙이 간직하고 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독서실에서 만난 여학생이 있었다. 바로 이웃 여학교의 학생이었는데, 우리는 매일 만났고 공부도 했지만 공부보단 만나는 일에 더 열심이었다. 대입시험을 치른 뒤 2월에 함께 가까운 야외로 나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두근거리는 가슴과 설레이는 마음으로 손끝만 닿아도 소스라쳐 움츠리던 때였다. 그 때 그녀가 불러준 노래가 바로 '동심초'였다. 막 해가 떨어져서 노을에 짙게 젖은 야외에서 사랑하는 그녀가 불러주던 동심초는 말 그대로 환상이었다.
그 후 여러 이유로 그녀와 헤어진 뒤 대학교 2학년 겨울방학 때 가까운 문학 동인회 회원들과 함께 울진 불영사를 찾았다. 버스를 몇 번씩 갈아타고 힘겹게 찾아간 불영사에서 부처님의 그림자를 찾으려고 기웃거리고 있을 때였다. 절집 툇마루에 앉아 말린 나물을 다듬고 있던 젊은 보살님이 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 오막한 계곡을 울리는 노래소리는 그대로 나의 가슴에 칼로 들어왔다.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일 수도 없었다. 나무들은 바람에 가지 끝이라도 움직일 수 있었겠지만 나는 아무런 움직임도 할 수가 없었다.
그 때 스님이 나오셔서 보살님의 노래를 만류하는 것이었다. 나는 아쉬움에 더 마음이 아팠지만 그래도 그 나름대로 맛은 있었다. 가사는 당나라 여류시인인 설도가 쓴 시를 안서 김억이 번역한 것이며, 김성태님이 곡을 붙였다. CD에서 들으면 그런 맛이 나지 않을 것 같아 오히려 듣는 것이 주저되는 노래, 마음 속에 가만히 아끼고픈 노래가 바로 동심초다. - 서정윤(시인)
◇ 젊은 시절 고독과 함께 했던 닉 드레이크
겨울비 내리는 날, 나는 어느 흐린 주점에서 닉 드레이크를 만나고 있을 것이다. 번잡은 것을 좋아하지 않았던 나는 대학가의 구석진 곳에 텃밭이 달린 자취방에서 한 시절을 보낸 적이 있다. 시인 백석의 로망도, 이상의 권태도, 랭보의 열망도 아련하게 즐기던 시절. 나의 몽롱한 삶을 지탱해준 음악이 있다면 도어스(Doors) 와 닉 드레이크(Nick Drake)다. 랭보의 시 구절 같던 도어즈의 광기어린 부르짖음과 건조하고 음습한 닉드레이크 음악의 허무감이 좋았던 시절. 비만 오면 한 없이 비와 함께 그들의 음악에 젖어 들었다.
그 중에서도 닉 드레이크의 'Time Of No Reply' 앨범은 도시라는 황량한 사막에 눈물 방울 떨구며 살아가는 외로운 낙타들(군중 속의 고독자)을 위한 노래다. 소낙비 내리던 날 촛불 하나 켜놓고 쓴 소주에 인생을 묻으며 자살하고픈 슬픈 유혹에 동지가 돼 주었던 고독자의 노래. 젊은 나이에 요절한 닉 드레이크의 음울한 음색과 시를 읆조리는 듯 노래하며 다정하게 퉁겨주는 통기타 소리는 회색도시에서 지친 도시인들에게 목가적 정서를 전해준다. 앙상한 가지가 찬바람에 쓸쓸함을 전해주는 계절, 겨울비라도 내리는 날에는 닉 드레이크의 음악을 들으며 잠시나마 이 외로운 군중속의 고독을 위안 받자. -전우태(북카페 소설)
◇ 아픔으로 남아있는 '미련한 사랑'
2년 전 우연한 기회로 만나게 된 그녀는 나의 이상형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다. 동그랗고 까만 눈동자, 오똑한 콧날, 하얀 피부. 첫 눈에 그녀는 내 마음속에 완전히 자리잡아 버렸다. 동갑이었던 우리는 금방 친해졌고, 매일 데이트를 하는 사이가 됐다.
하루는 그녀의 집 근처 노래방에 갔는데 갑자기 엄마가 급히 찾는다며 집에 들어가야겠다고 했다. 그녀를 보낸 뒤 집 앞 골목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30분이 지나도 안나오던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다. 수화기를 타고 흘러나온 목소리는 낯선 남자였다. 성난 남자의 목소리 뒤로 그녀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그랬다. 그녀와 결혼을 전제로 만나는 남자라고 했다. 머리가 텅 비어버렸다. 집에 갈 수도 없어서 차에서 연신 담배만 피워댔다. 몇 시간이 지나 그녀가 울면서 전화를 했다. 속일 생각은 없었지만 너무 좋아서 그랬다고.
그 후로도 그녀가 그리우면 매번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전화번호를 눌렀지만 차마 통화 버튼을 누를 수 없었다. 괴로움에 혼자 밤거리를 헤매고 운전을 할 때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노래가 바로 JK 김동욱의 '미련한 사랑'이었다. '헤어 날 수 없는 미련한 사랑에 조금씩 빠져들어가고 있다'는 마지막 구절은 나의 미련한 사랑을 그대로 옮긴 것 같은 착각마저 들게 했다. -이상민(동아백화점)
◇ 떠난 제자를 추억하며
"여보세요! 박 선생, 그 반의 동주(가명)가 동산병원 응급실로 가고 있으니까 병원으로 빨리 가세요." 새벽잠을 깨운 그 날의 말은 비만 오면 쑤셔오는 통증처럼 지워지지 않는 아픈 기억으로 남아있다.
3월, 학생들에게도 가슴 설레는 시작이겠지만 교사인 나 역시 기대감으로 부풀게 된다. 새 학기가 시작된 지 일주일도 채 안되 아직 학생들의 이름도 얼굴도 다 인식하지 못한 시기였다. 전화를 받고 병원으로 가는 내내 아무리 동주를 생각해봐도 떠오르지 않았다. 산소호흡기 등 수많은 장비 속에 축 늘어진 그를 보고서야 어렴풋이 맨 앞자리에 수줍게 앉아있던 희미한 기억을 되살려 낼 수 있었다.
4월 마지막 주 수업을 마치고 뒷정리를 하고 있던 교실로 교감 선생님이 찾아왔다. "박 선생! 동주가 방금 죽었다는데…." 화장을 마친 뒤 18년 동안의 삶이 조그마한 나무상자에 담겨 내 가슴에 주어졌다. 나는 울 수가 없었다. 나를 보고 있는 남겨진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비록 차갑게 변해버린 육체였지만 그 순간만큼 동주는 따스했다. 부모도 함께 하지 못한 마지막 가는 길에 나의 손으로 따스한 흔적들을 차가운 흙으로 보냈다. 집으로 돌아와 조용히 문을 닫고 오디오를 켜고 플레이 버튼을 깊게 눌렀다.
오펜 바하의 '재클린의 눈물'. 온 몸을 울려 연주하는 첼리스트의 모습이 가슴 속으로 들어오는 순간, 참았던 눈물이 쏟아졌다. 이제 오펜 바하의 '재클린의 눈물'은 매년 학기가 시작하기 전 교사로서 자신을 돌아보기 위한 거울과도 같은 곡이다. 교사로서 또 다시 후회하지 않기 위하여. - 박태규(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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