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움직이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위대한 정치가나 경제인 혹은 영웅적 전략가?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어쩌면 자기 자리에서, 자신이 맡은 일을 충실히 해내는 사람들이 아닐까? 그래서 제 자리를 지키며 묵묵히 일하는 사람을 찾았다. 영웅호걸들의 이야기에 익숙해진 때문일까. 주변에 원칙주의자로 알려진 박정구씨는 만나자는 부탁을 극구 거절했다. "평생 조용하게 살아온 내가 무슨 할 말이 있나. 괜히 헛걸음 하지 마시라."
박정구 '꿈나무 집' 대표이사(75·원대 마을금고 소년소녀 가장의 집)는 완고한 낯빛을 갖고 있었다. 낯빛뿐만 아니라 말에서도 뚜렷한 의지가 묻어났다. 그는 한국전쟁과 월남전에도 참전했지만 살아나온 사람이다. 큰 부상을 입지도 않았고 고엽제 피해를 입지도 않았다. 물론 그가 피해를 입지 않았던 것은 특별히 용감했거나 비겁해서가 아니다. 박정구씨는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했다. 운이 나빠 미군이 농약을 살포하는 지역에 배치된 병사는 고엽제로 죽을 고생을 하고, 운이 더 나쁜 사람은 죽어서 돌아왔다고 했다. 죽거나 다친 사람들이 무슨 특별한 죄를 지은 것도 아니었다.
"우리는 그저 정치가 어지럽고 가난한 나라에 태어난 죄밖에 없었어요."
박정구씨는 군 제대 후 5년쯤 농사를 지었고, 대구시 노원동 '원대 새마을 금고' 이사장으로 27년을 근무했다. 금고 이사장 재직시절 소년소녀 가장을 위한 '꿈나무집'과, 경로당, 어린이 복지관(공부방 용도) 등을 지었다. 소액의 국가지원과 마을금고의 출원으로 설립한 법인이다. 운영 역시 국가지원, 마을금고 출원, 민간인 후원으로 꾸려오고 있다. 부모가 없거나 있어도 키울 형편이 안 되는 아이들을 먹이고 입히고 공부시키는 공간이다. 기초생활 보호대상자도 있고, 애매한 규정 때문에 이른바 '사각지대'에 놓인 아이들도 있다.
"전쟁때 죽은 군인이나 부역자들이 아무 죄가 없었던 것처럼 우리 꿈나무 집 아이들도 죄가 없어요. 불행이라면 가난한 부모를 만난 것 뿐이지요."
박정구씨는 가난과 불행을 구제할 수 있는 방법은 '희망'을 주고 '원칙'을 지키는 것이라고 했다. 마을금고 이사장으로 조용히 돈벌이에 매진해도 나무랄 사람은 없겠지만, 복지사업을 시작한 이유도 원칙을 지키고 희망을 주기 위해서였다.
박정구씨는 금고의 원래 설립 목적에 맞게, 돈을 벌어 저축하고, 이익을 주민 복지사업에 썼다. 소년소녀가장의 집, 어린이 복지관, 경로당은 모두 주민 복지를 위한 사업이었다. 금고 이사장으로 재임한 27년, 그리고 꿈나무집 대표이사까지 35년 동안 한번도 월급을 받지 않았다고 했다. 굳이 월급을 받지 않아도 생활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정치권에서는 너도나도 경제를 외칩니다. 경제를 외치기만 하면 잘 살아집니까? 잘 살려면 원칙을 지키고 부지런해야 해요. 부지런해지려면 희망이 있어야 합니다. 내일은 오늘보다 나을 것이라는 희망 말입니다. 희망이 없으니까, 편법을 쓸 궁리나 하는 것 아닙니까?"
박 이사장은 꿈나무집 아이들을 예로 들었다. 이곳 아이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꿈나무집을 떠나 취직한다. 그래서 대부분 공고로 진학하는데, 진학해서도 공부하지 않는다. 이놈들, 공부 좀 해라고 아무리 다그치고, 과외 도우미를 불러서 가르쳐도 공부하지 않더라고 했다.
"아이들 대답이 가관이었어요. '우리는 공부하는 아이들 아닙니다.' 왜냐고 물었더니, 어차피 공고 가서 적당히 취직할 건데, 뭐 하러 공부하느냐 겁니다. 공부해도 고등학교 졸업하면 이 집에서 나가야 하고, 누가 대학 보내 줄 것도 아니라는 것이지요."
박정구 이사는 아이들에게 구체적인 계획을 보여주며 미래를 약속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군 입대 전까지 얼마를 모아라. 그러면 자신이 얼마를 보태 주겠다. 그 돈이면 학비가 된다. 본인이 노력하면 대학까지 책임지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구체적인 목표가 생기니 아이들이 변했어요. 공부하라고 말할 필요도 없어요. 알아서 돈 벌고, 알아서 공부합니다. 희망을 본 것이지요. 국민들도 똑 같아요. 경제를 외치고 자식을 더 낳으라고 소리치면 뭐 합니까? 내일이 오늘보다 나을 것이라는 희망을 주면 됩니다. 희망만 있으면 더 부지런히 일하고, 자식도 더 낳을 겁니다.
행복해지자고 다짐한들 행복해지지 않는다. 현재의 가난이나 불행을 자꾸 생각하기보다, 작지만 내집을 마련할 꿈, 조금 더 나은 내일에 대해 구체적인 목표를 세울 것을 권유했다.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사진·정재호 편집위원 newj@msnet.co.kr
댓글 많은 뉴스
나경원 "李 장남 결혼, 비공개라며 계좌는 왜?…위선·기만"
이 대통령 지지율 58.6%…부정 평가 34.2%
李대통령, 대북전단 살포 예방·사후처벌 대책 지시
대통령실 "국민추천제, 7만4천건 접수"…장·차관 추천 오늘 마감
또래女 성매매 시키고, 가혹행위한 10대들…피해자는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