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40명을 태운 버스는 구마고속국도를 지나 남해고속국도로 진입하고 있었다. 모두가 서둘러 준비한 덕에 제시간에 출발할 수 있었던 게 다행스러웠다. 김승옥의 '무진기행'의 배경인 '순천만'을 찾아가는 길이다.
문학기행의 답사지는 대체로 평범하다. 아이들은 그 평범함 속에 감추어진 진실을 어른보다 먼저 발견하고 감동한다. 아이들은 자발적으로 김승옥의 '무진기행'에 대한 토론을 시작했다. 뜨거운 토론이 1시간 이상 이어졌다. 더 오랫동안 토론을 할 수 있었지만 버스가 이미 순천만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비는 서서히 그치고 있었다.
순천만이라는 도로 표지판을 따라 좁은 시골길을 지났다. 버스는 아슬아슬하게 논길을 지나고 있었다. 작은 공터가 나왔다. 드디어 버스는 더 이상 앞으로 나갈 곳이 없었다. 대대포라는 지명은 확인할 수 있었지만 인터넷에서 보았던 갈대밭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잘못 길을 든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컸지만 이왕 온 길이기에 돌아갈 수는 없었다. 아이들이나 다른 선생님들은 아마 이런 내 마음속의 답답함을 모르고 있을 게다. 공터 가에 있는 식당가를 지나 작은 언덕을 넘었다. 그런데, 아! 당신들은 그런 아름다움을 본 적이 있는가? 정말 끝이 보이지 않는 갈대밭이 눈앞에 펼쳐졌다. 어깨를 살짝 적실 정도의 이슬비와 아직 완전히 마르지 못한 비안개가 대대포 갈대밭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34명의 아이들, 5명의 선생님 모두의 입에서 동일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여기가 무진이로구나. 그렇다. 무진이라는 실제 지명은 지도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안개 나루(무진)라는 지명은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이 풍경을 표현할 수 있는 가장 김승옥다운, 순천만다운 이름이다. 이미 우리들의 눈에는 물기로 가득 찬 안개가 수없이 내리고 있었다.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 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恨)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女鬼)가 뿜어 내놓은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는 그것을 헤쳐 버릴 수가 없었다.
-김승옥의 '무진기행' 중에서
버스를 갈대밭 건너편 전망대 휴게소로 보내고 거기까지 방조제를 따라 걸어가기로 했다. 구불구불 끝도 없이 이어진 방조제, 그리고 그 아래에서 아름다운 군무를 추고 있는 갈대, 군데군데 갯벌에서 놀고 있는 수많은 게들, 개망초꽃, 찔레꽃, 구절초를 비롯한 이름 모를 들꽃들. 아이들은 3시간이나 되는 먼 길을 조금도 싫증내지 않고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발을 옮기고 있었다. 걸어가는 도중, 순천만 자연 환경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시는 순천만 지킴이 두 분을 만나 많은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이런 예상하지 못한 만남은 문학기행의 또 다른 즐거움이다. 생각보다 길이 너무 멀었기에 그 분들의 안내로 지름길을 택했다. 겨울 순천만이 정말 아름다우니까 겨울에 꼭 다시 오라는 그분들의 말씀을 뒤로 들으면서 막 어스름이 내리려는 순천만을 뒤로 하고 버스에 올랐다. '무진기행'의 마지막 대목이 자꾸 내 귀를 어지럽게 했다. 하지만 주인공이 느꼈던 부끄러움보다는 이곳을 방문한 기쁨과 뿌듯함이 내 내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 '무진기행'
'무진기행'은 1960년대 한 지식인의 자화상을 통해 당대인의 내면 풍경을 여실히 드러낸 가장 김승옥다운 작품이다. '떠남-돌아옴-떠남'의 원점회귀적 구조를 통해 인간의 삶의 양면적인 모습을 '길'이라고 하는 인생의 상징적 의미 속에 녹여내고 있다.
안개의 이미지로 표상되는 '무진'의 삶은, 우리 인간의 내부에 은밀히 웅크리고 있는 일탈과 욕정, 패배와 절망이라는 정서와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고, 서울은 현실적인 삶만이 숨 쉬고 있으며 원초적 인간성이 사라진 공간이다. 그 사이에 살고 있는 우리는 끊임없이 양자를 오가는 존재들이다. 서울은 분명 인간적인 것과 거리가 있는 곳이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터전이다. 이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결국 '나'는 '무진'을 버리고 '서울'을 선택한다. 이 두 개의 삶에서 방황하고 있는 1960년대 지식인의 내면 풍경이 이 작품이 그리고 있는 세계인 것이다.
한준희(경명여고 교사)
※ 앞으로 이 공간은 문학기행에 대한 이야기로 채워질 예정입니다. 순천에서 시작하여 전라도와 충청도, 강원도와 경상도를 이어 대구까지 돌아오는 이야기가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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