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웃사랑)"부모님 만날 때 까지 꼭 살고 싶어요"

백혈병 투병 김수진씨

▲ 백혈병으로 경북대병원에서 항암 치료를 받고 있는 김수진 씨가 눈물을 참아내며 어릴 때 자신을 버린 부모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 백혈병으로 경북대병원에서 항암 치료를 받고 있는 김수진 씨가 눈물을 참아내며 어릴 때 자신을 버린 부모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꿈을 꾼다. 엄마의 젖꼭지를 한 아름 입에 물고 힘차게 빨고 있는 내가 보인다. 엄마는 아주 조금 자란 내 머리를 연방 쓰다듬으며 "옳지, 옳지."라고 말한다. 나는 엄마 품에 악착같이 매달려있다. 또 꿈을 꾼다. 엄마는 자신의 허벅지 위에 나를 눕힌 뒤 머리를 감겨준다. 빨간색 대야에 내 머리를 살포시 담그고는 행여 눈에 물이라도 들어갈까 자꾸 닦아낸다. 엄마는 내 얼굴 정면에서 웃고 있다. 그 얼굴이 또렷하다. 손에 잡힐 듯, 깨어나도 선명하게 그릴 수 있을 것 같은, 바로 내 앞에서 엄마가 웃고 있다.

스물두 살, 저는 고아입니다. 다섯 살 때 경북 의성의 한 보육원 앞에 버려진 저는 열여덟이 될 때까지 거기서 자랐지요. 꿈에서는 선명했던 엄마의 얼굴은 깨어나면 곧 지워졌고, 기억하려고 잡은 연필로는 단 하나의 선도 그릴 수 없습니다. 아빠를 닮았는지 엄마를 닮았는지, 제가 부모 없이 자랐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웃으면서 묻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코끝이 시려옵니다.

지난 5월. 으스스한 기운에 감기몸살인 줄 알고 찾았던 동네 한 내과에서 빈혈증세가 심하니 큰 병원으로 가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피를 뽑았고 며칠 뒤 '급성 림프구성 백혈병'이란 진단을 받았습니다. 4차례 항암치료를 받았는데 같은 골수를 이식받으면 살 수도 있다고 하네요. 가족에게서 같은 골수를 찾을 가능성이 크다는데…. 저는 어떻게 가족을 찾지요?

고교 졸업 후 보육원에서 나오면서 독립지원금으로 100만 원을 받았습니다. 대학은 많은 돈이 필요했고, 당장 살아갈 돈부터 필요했습니다. 기숙사가 있는 구미의 한 공장에서 부품을 조립하면서 1년을 보냈고 넉넉하지는 않지만 돈을 조금 모았습니다. 어느 날 공장 직원이 "왜 고아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느냐?"고 했습니다. 회사에서는 제가 잘 지내고 있다는 얘기를 하기 위해 사원현황에 있는 전화번호로 통화를 했고 거기가 보육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지요. 그 뒤, 사람들의 눈빛에서는 애처로움과 가여움, 안타까움이 묻어났지요. 그 시선이 싫어서 그곳을 떠났습니다.

저는 악착같이 살았습니다. 엄마 품에 악착같이 매달려 있었듯, 그보다 더 지독하게 살았습니다. 배우지 못해 할 수 있는 일이 적었고 호프집에서 새벽 늦게까지 일을 해서 몇십만 원을 받았습니다. 낮에는 재래시장의 옷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지요. 그래도 핏줄을 알고 싶었기에 한 번씩 찾아간 동사무소에서는 "부모를 찾기 힘들다."는 얘기만 했습니다. 차라리 찾아지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잘 살지 못하는 당신을 못 본 척할 수는 없을 테니까요.

가장 힘든 건, 이렇게 아등바등 살아왔는데 또 다른 시련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저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꿈이 있지만 아직 시작도 못 했고, 꼭 한 번 비행기를 타 보고 싶다는 생각도 아직 실천에 옮기지 못했는데 말입니다. 외국어도 배우고 싶고, 컴퓨터도 잘하고 싶고, 하고 싶은 일들이 너무 많은데….

16일 경북대병원에서 만난 김수진(22·여) 씨는 "저는 오른손이 왼손의 절반 크기예요. 기형인데 엄마, 아빠가 저를 알아볼 것은 이것뿐이지요."라고 말했다. 선명한 쌍꺼풀에 백지장 같은 하얀 피부. 항암치료로 다 빠진 머리를 감추려 수건을 동여맨 그녀는 엄마, 아빠를 얘기하면서도 끝내 눈물을 참아냈다. 강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면서.

저희 이웃사랑 계좌는 069-05-024143-008 대구은행 (주)매일신문사입니다.

서상현기자 ssa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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