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상처가 예술을 낳는다] ⑫소설가 김원우

머릿속에 수 놓았던 '또 다른 삶' 열망

"아버지 원망 많이 했지. 가족이야 죽든 살든. 미친 짓 아냐?"

예순을 넘긴 소설가의 입에서 모진 말이 나왔다. 술자리의 취기도 있었지만, 아버지가 떠난 후 겪은 모진 고초의 잔가지들이 울컥 치밀어 오른 때문이기도 했다.

소설가 김원우(61). 그의 아버지(金鍾杓)는 1950년 광란의 전쟁에서 북을 선택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패퇴하는 인민군과 함께 3남매와 아내를 남겨둔 채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떠난 것이다. "아버지는 남로당 조직책으로 꽤 유명했지. 경남도당 부책까지 했으니까. 해방 전에도 여러 차례 옥고를 치렀어."

아버지는 빈자리만 남긴 것이 아니었다. "어머니 가슴을 보면 시커먼 흉터가 있어. 인두로 지진 흔적 같아. 고문도 많이 당했을 거야." 그 흉터는 빨갱이 가족의 낙인이면서, 아버지 없는 아들, 과부 아닌 과부의 화인(火印) 같은 것이었다.

고향 김해시 진영읍을 떠나 대구에 온 것도 화기(火氣)를 조금이라도 피해보자는 심정이었다. "경찰에 안 불려 다니는 것만으로도 다행스런 일이었지." 이후 이들 가족의 궁핍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기적같이 살았다."고 표현했다.

아버지가 떠날 때 그는 겨우 네 살이었다. "형은 아버지를 기억하지만, 난 얼굴도 생각 안 나." 그의 형은 '마당 깊은 집'의 소설가 김원일(66)이다. 대구의 삶은 참으로 비루했다. 어머니는 기생들 한복 바느질로 겨우 가족들 입에 풀칠을 했다. 도시락도 못 싸 가 점심시간에 운동장을 배회하며 허기진 배를 달래곤 했다.

아버지의 공백은 살아야 한다는 절박함을 가족들에게 주었다. 그것은 어떻게 사느냐가 아니라,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였다. 과부는 매질로 아들을 키웠다. "형이 많이 맞았지." 한번 씩 팰 때마다 오줌이 질금질금 나도록 때렸다. '인간이 되라'고 했지만 그것은 '아버지처럼 되지 말라'는 뜻이기도 했다.

무책임한 남편에 대한 원망과 고단한 삶의 피로감이 회초리에 실렸다. "일종의 화풀이기도 했어. 과부의 히스테리지." 어머니는 억척스러웠다. 바느질감이 없으면, 마산에서 함석통에 든 멸치젓을 떼와 염매시장 등에서 팔았다.

"책 없이 공부한 상처도 혹독했지." 셋집을 전전하면서 겨우 밥을 먹는 형편에 책 사는 것은 엄두도 못 냈다. 그 바람에 결손가정의 차남으로서 남들과 경쟁할 수 없다는 낙오자의 상처도 입었다. 자연히 공상하는 일이 잦아졌다. "방법이 없었으니까.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세상에 돈 없이 되는 일이 잘 있나? 그런데 소설은 볼펜 하나만 있으면 되잖아."

이런 궁핍하고, 절박한 상황이 이들 형제를 '이야기꾼'으로 만들었다. 소설가로, 머릿속 가상을 원고지에 채우면서 살도록 했다. 소설은 냉혹한 현실의 유일한 탈출구였다. "슬퍼해도 소용없었어. 소설에 내 얘기를 꾸며보자는 생각이 들었지."

원우는 그의 필명이다. 본명은 원수(源守)이다. 자꾸 놀림감이 되니까 '수'를 '우'로 바꾸었다. "성까지 바꿨어야 했는데···"라는 말에서 아버지의 이름마저 거부하고픈 심정도 담겨있는 듯 했다. 월북한 아버지는 남로당 숙청에서도 용케 살아났으나, 가족을 버린 결연함과 다른 남루한 삶을 살았다. 북에서 황해도 여자와 결혼해 아이도 둘을 가졌다.

김원우는 무기력한 개인의 삶과 타락한 중산층의 허위의식 등 우리 시대의 초상을 선 굵은 필치로 그려오고 있다. 슬픈 가족사를 많이 다룬 형과 달리 그의 작품은 반항아적인 문제의식이 담겨 있다.

"안 그래도 형이 그래. 원우한테 미안하다. 소설가로 쓸거리를 혼자 다 써 먹어서." 그는 작가로서 형의 '그늘'을 피해야 하는 어려움도 있었다. 아버지에 대한 동의 반복도 철저히 피했다. 그래서 그럴까. 그의 초기 작품에는 아버지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형과 달리 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하나도 없어. 알코올 중독자든, 몽둥이를 든 폭력 아버지든, 아버지의 상(像)이 없었으니까, 그릴 수도 없었지." 아버지의 부재와 그로 인한 상처는 자생적인 치유력을 가지게 된다. 바로 세월이다. 이제 아버지의 모습도 작품에 등장한다.

이번 달 문학지에 게재되는 단편 '미치도록 살아간다'에는 최 원장이라는 인물이 나온다. 이북에서 월남한 '삼팔 따라지'(38도선을 넘어온 사람이란 뜻) 부모의 둘째 아들이 썩을 대로 썩은 세속화 과정에서 자기반성에 빠지는 이야기다. 또 이 작품에는 최 원장의 고교 동기인 소설가 교수가 나온다.

2년 전 쓴 단편 '달리는 풍속도'와 곧 발표될 700장의 중편 '참을만한 생존의 가지 끝에서'와 함께 연작 3부작에는 과묵하고 생활력 강한 아버지의 모습이 그려진다. 무책임하게 가족을 버린 김원우의 아버지가 아니라 서문시장에서 장사를 하면서 근검절약하고 부지런한 그런 아버지들이다.

그가 비비고 싶은 그런 '언덕'들이다. 흑백사진 속에만 있는 유령 같은 아버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그 체온을 감지하려는 소설가의 연민이 퇴색된 인화지처럼 아련해 보인다.

김중기기자 filmtong@msnet.co.kr

1947년 4월 11일 경남 김해시 진양읍에서 출생. 경북대 사대 부속고를 거쳐 1973년 경북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 1977년 중편 '임지'로 등단. 1980년 '죽어가는 시인', 1981년 '무기질 청년' 발표. '인생 공부'(1983), '장애물 경주'(1986), '세 자매 이야기'(1988), '아득한 나날'(1991) 등 창작집 출간. 대표작으로 1983년 한국창작문학상을 받은 '불면 수심', 1970년대 말의 서울을 배경으로 우리 시대의 병적 징후를 파헤친 장편 '짐승의 시간', 매일신문에 연재된 역사소설 '우국의 바다', 1991년 동인문학상 수상작인 중편 '방황하는 내국인'등이 있으며 1999년 중편 '반풍토설초'로 오영수문학상, 2002년 '객수산록'으로 대산문학상 수상. 현재 계명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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