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여름을 뜨겁게 사는 사람들이 있다. 1천500℃를 오르내리는 용광로에서 펄펄 끓는 쇳물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내는 주물공장 사람들이 그들이다. 한낮 기온이 35℃만 돼도 '폭염주의보'를 내리는 등 호들갑을 떠는 바깥사람들이 그들 눈에는 얼마나 우습게 보일까.
경북 고령군 다산면 다산지방산업단지에는 45개의 주물업체들이 모여있다. 대구경북 지역의 주물공장들은 대부분 이곳에 몰려있는 셈. 선박부품을 생산하는 세화엔지니어링(대표 박광순)과 자동차부품을 생산하는 해원산업(대표 남원식)을 찾았다.
공장 안으로 들어서자 후끈거리는 열기가 대단하다. 40℃가 넘는다. 불과 5분이 지나자 땀이 비 오듯 쏟아진다. 사우나가 따로 없다. 공장 한복판에서는 선철을 용해하는 2t반짜리 전기로 두 대가 쉴새없이 쇠를 녹이고 있고 안쪽에서는 제품의 후처리가공을 하느라 불꽃이 튄다. 입구 쪽 거푸집을 짜는 숙련공들의 손길도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일이 힘들고 아니고는 사람 마음먹기에 달려있는 것 아닌가요. 힘들다고 생각하고 오지만 막상 와보면 그렇지도 않아요."
10년째 쇳물을 다루고 있는 박연묵(41) 씨. 조종간을 잡고 선철을 자석으로 끌어올려 전기로에 넣은 다음 마그네슘을 비롯한 각종 첨가물을 섞느라 잠시도 쉴 틈이 없다. 전기용해로 가까이는 온도가 급상승한다. 보호고글을 끼지 않고는 펄펄 끓는 쇳물을 바라보기도 힘들다.
주물공장에서 일하려면 체력이 좋아야 한다. 박 씨는 "특별한 체력관리비법은 없다."면서 "먹는 거 똑같이 먹고 친구들과 어울려 가끔 횟집에 가고 그러는 것밖에 없다."고 말했다. "하루 지나면 또 하루가 가는구나 생각하다 보니…." 박 씨는 혼기를 놓쳐 마흔이 넘어버렸다. 그래도 일이 고된 만큼 다른 업종에 비해 보수는 두둑한 편이라 위안이 된다. 세화엔지니어링 공해수 이사는 "젊은 사람은 거의 오려고 하지않아서 평균연령이 높은 편"이라고 말했다.
땀이 많이 나고 체력소모가 많다. 그래서 구내식당에서 제공하는 식사는 시중보다 낫다. 중복인 25일 이곳 구내식당에서는 삼계탕을 제공했다. 점심과 저녁 두 끼는 회사에서 먹는다.
박 씨같이 주물을 직접 다루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없다. 전기로를 잘 다뤄야하고 또 각종 첨가제를 적절히 넣어 강도를 규정치에 맞춰야 할 정도로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거푸집 작업을 하는 인석원(69) 씨는 주물공장에서만 50년을 일했다. 이 회사의 정년규정은 60세지만 체력이 보장된다면 나이는 무시된다. 칠순을 바라보는 인 씨는 "요새는 삽질도 하지않아 힘들지 않고 옛날보다 참 좋아졌지…."라면서 "예전에는 공장 안이 뜨겁고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먼지로 가득 찼다."고 말했다. 영남주물 등 예전 주물공장 전성시절에는 1년이 지날 때마다 회사로부터 광목1필이나 쌀 한 가마씩을 받기도 했다. 3남매를 다 키운 '주물쟁이 50년 인생'이다.
"내가 만든 주물이 대형선박에 장착돼서 오대양 6대주를 누빈다고 생각하니 뿌듯하지." 작은 주물공장에 다닐 때는 가마솥이나 정미기, 발동기 등을 만들었다.
후처리작업을 하는 뒤쪽 작업장으로 갔다. 이곳은 주물공장에서도 가장 열악한 작업환경이다. 4㎏을 웃도는 그라인더로 1차 처리된 주물제품의 표면과 내부를 부드럽게 처리하는 작업이다. 그라인더를 주물에 대자 불꽃이 사방으로 튀었다.
800㎏짜리 선박엔진주물을 처리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30여 분. 초보자는 하루 온종일 해야할 작업이다. 전대덕(60) 씨는 24년째 이런 주물일을 해왔다. 그가 작업하던 그라인더를 들어봤다. 계속 들고 있기가 힘들 정도로 무거웠다. 이 작업공구를 잡고 8시간 동안을 쉬지않고 쇠를 간다.
"천직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이 제품을 '화장'시키지 않으면 제대로 대접받지 못합니다." 땀으로 뒤범벅이 된 얼굴이지만 그는 "그래도 즐겁게 일하는 것이 제일"이라며 다시 그라인더를 잡았다. 뒤쪽에서 대형선풍기가 뜨거운 바람을 내보내고 있었지만 흘러내리는 땀을 멈추게는 못한다.
거푸집 작업을 하던 강현희(47) 작업반장은 "아무나 이 일을 할 수 있는 건 아니다."며 "숙련된 경험과 노하우가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놀랍게도 세화엔지니어링에는 그 흔한 외국인노동자가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힘든 3D업종이지만 내국인을 우선적으로 고용하겠다는 고용주의 입장이 반영된 결과라고 했다.
초강력 집진기가 가동되고 있어도 쇳가루와 분진이 날아다니고 보호장구를 착용하지 않고서는 잠시도 작업할 수 없는 곳이 이런 주물공장이다. 1천500℃로 가열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끓는 쇳물을 구할 수 없다 . 땀 없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주물공장사람들. 그들은 '이열치열(以熱治熱)'을 느끼지 못한다. 뜨겁게 달궈진 쇳물로 엔진부품과 자동차부품을 만드는 그들은 오히려 여름을 잊고 살고 있다.
글·서명수기자 diderot@msnet.co.kr
사진·김태형기자
▶ 그들만의 여름나기 비법은?
바깥 온도가 30℃ 이상을 오르내리면 공장안은 더 뜨겁다. 항상 1천℃~1천500℃를 오르내리는 전기용해로가 끓고 있는데다 뜨거운 쇳물로 작업하기 때문에 공장내부는 40℃ 이상이다.
그렇다고 이런 주물공장에 에어컨을 돌릴 수는 없는 일. 한겨울에도 사방을 날아다니는 분진과 쇳가루 제거 및 통풍을 위해 문을 닫을 수 없는 것이 주물공장의 사정이다. 그래도 납기를 지켜야 하고 2교대작업을 해야 한다.
주물공장에서 오래 일한다고 해서 땀이 나지않는 것이 아니다. 더위에는 내성이 먹혀들지 않는다. 박연묵 씨처럼 오로지 즐겁게 일하는 수밖에 없다.
'얼음재킷'을 착용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그러나 냉매를 얼려서 사용하는 얼음재킷은 무거운 게 흠. 쇳물작업을 하는 직원들에게 얼음재킷을 지급하면 무겁고 작업에 거추장스럽다는 이유로 착용을 기피한다. 그래서 공장 측은 대형선풍기를 곳곳에 설치, 근로자들이 더위에 지치지않도록 배려하고 있다.
각 주물공장마다 구내식당에서는 든든한 보양식으로 체력보강에도 신경을 쏟는다. 세화엔지니어링은 매일 제공하는 두끼의 식사 중 한끼에는 반드시 쇠고기와 돼지고기 등 육류를 곁들인다. 땀을 많이 쏟아내는 만큼 육류섭취를 통해 여름철 체력저하를 방지하겠다는 것이다. 가끔씩은 울진에서 직접 대게 등을 공수, 특식으로 제공하기도 한다. 물론 복날에는 삼계탕 등의 특식도 준비하고 있다.
이곳 다산단지의 모든 주물공장의 복지수준이 비슷한 것은 아니다. 더 열악한 환경도 적지않다.
일부 업체는 한낮을 피하는 방법을 택하기도 한다. 심야조업을 할 경우 한낮 무더위를 피해갈 수 있는데다 심야전력을 사용, 전기요금까지 아끼는 일석이조의 효과까지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해원산업의 경우, 3분의 1로 절약된 전기요금으로 종업원들에게 상여금을 주는 것으로 더위를 가시게 하는 방법을 택했다.
서명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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