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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세이] 도서관, 가을 숲의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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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는 특유의 냄새가 있다. 오래 묵은 책들이 차곡차곡 쌓여 뿜어내는 특유의 숨 막히는 향기가 있다. 머리를 짓누르는 이 나른한 향기에 대해 뭐라 한 마디로 정의 내리기란 참 어렵다. 어쩌면 내력 있는 종갓집의 잘 담근 간장이나 된장처럼 책들이 발효되는 냄새라 해야 할지, 낡은 옷장에 걸린 옷들에서 나는 방충제 냄새라 해야 할지, 아니면 언어들을 가득 담고 있는 이 많은 군서들이 밤낮없이 중얼거리고 있는 입 냄새라고 해야 할지… (책들의 영창은 이 도서관을 믿음이 가는 장엄한 공간으로 확대시킨다.) 아무튼 이 묵은 것들의 냄새가 싫지 않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도서관에만 가면 졸음이 쏟아진다. 평소 잠을 잘 못 자는지라 그래서 도서관은 내게 더 특별한 장소가 된다. 일 때문에 올라가 전공과 관련된 책을 찾다 보면 원래 찾으려 했던 것보다 더 흥미를 끄는 책들이 자꾸만 눈에 띈다.

마치 오랜만에 백화점에 들른 여자가 새로운 옷들에 현혹되어 이것저것 사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듯이, 혹은 장난감 가게에 들른 아이가 이것도 사고 저것도 사고 싶어 떼를 부리는 심정같이, 시간적 여유가 없어도 쫓기듯 다른 책들에 한눈을 팔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놀랍게도 이 흥미로운 곳에서 잠이 쏟아지는 것이다. 서가에서 필요한 책들을 찾고, 이것들을 가져와 목차를 살피는 동안 졸음은 서서히 머리를 짓누른다. 잠을 물리쳐가며 필요한 것들을 겨우 복사하고 대출할 책들을 챙겨 도서관을 빠져나올 때까지 졸음은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한데 건물 바깥으로 나오자마자 졸음은 순식간에 달아나 버린다. 아마도 졸음은 책 냄새 때문인 것 같다.

오래되고 묵은 것들의 냄새는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어쩌면 어릴 적 엄마의 젖 냄새라든가 먼 밤길 아버지의 등에 업혀오며 맡았던 아련한 체취 같은 것을 이 도서관에서 다시 느꼈는지 모른다. 독서란 영혼을 치유하는 순례의 길로 인식된다.

페이지의 어원인 라틴어 '파기나'는 포도나무의 늘어선 줄을 의미하고, 읽는다는 것은 거두어들이는 것을 뜻한다. 독서란 풍요를 상징하는 포도 수확에 다름 아닌 것이다. 이 검은 문자들을 발효시켜 지혜의 포도주로 만들고 인간은 그것에 취한다. 그윽하고 진한 술, 이 군서들이 뿜어내는 향기가 영혼을 편안하게 만드는 안정제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정신은 이 풍요에 취해 졸음 속으로 빠져들게 되는 모양이다.

도서관은 울울창창한 가을 숲과 같다. 금박을 입힌 책들과 색색으로 장정된 신간들, 낡고 해진 책들은 한창 단풍 들고 있는 나뭇잎과 바래가는 잎사귀들의 모습을 하고 있다. 창으로 들어온 가을 햇살이 드넓은 도서관 숲을 환하게 비추고 있다.

경산으로 이사 온 후로 집 근처의 산에 자주 올랐다. 남천을 건너고 기찻길을 넘어 이 숲에 드나드는 동안 어느새 가을이 왔다. 썩은 사과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시를 쓰는 시인처럼 노곤한 숲의 향기에 이끌려 오늘도 나는 산에 오른다.

가을 숲의 향기는 낡고 오래된 책에서 나는 냄새와 참 비슷하다. 쓰러진 나무 등걸에 앉아 땀을 식히며 숲이야말로 하나의 거대한 도서관이며, 빽빽이 서 있는 나무들은 각각의 책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이 숲에서 나는 봄부터 여름까지 줄곧 푸른 책들을 읽었다. 바람이 책갈피를 넘기며 웅얼웅얼 책 읽는 소리를 들었다. 맹독의 뱀이 지나가는 이 가을 숲에서 나도 이제 한 그루의 그윽한 가을 나무가 되고 싶다. 한 권의 책이 되고 싶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고, 이 숲에는 조물주가 만들어 놓은 빛의 언어들이 숨겨져 있다. 숲은 의미의 세계이며 지혜와 영감의 장소이다. 이 낡아가는 가치들을 읽으려 나는 만추의 도서관으로 올라간다. 마른 잎사귀들이 수런거리는 소리, 낙엽의 향기를 맡다 보면 어느새 내 영혼도 붉게 물이 든다.

서영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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