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2007 농촌체험] (20)영양 두메송하마을

피었다 몰래 지는 고운 마음은 흰 무리 쓴 촛불이 홀로 아노니

꽃 지는 소리 하도 하늘어 귀 기울여 듣기에도 조심스러라

두견이도 한 목청 울고 지친 밤 나 혼자만 잠들기 못내 설어라.

지훈(芝薰)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수백 년 세월을 이어온 고고한 선비정신이 마을 곳곳에서 낯선 도시민들을 지켜보는 듯하다. 마을 입구 소나무숲에서도, 종택 솟을대문 목각 태극기에서도, 훌륭한 지사·문인을 배출한 근원이라는 문필봉에서도.

미처 조지훈을 모르는 코흘리개들도 그 위세 앞에 잠시나마 숙연해진다. "엄마, 이 집은 되게 오래됐나봐요?" "그래, 400년이 다 되어간다는구나. 이런 집에 살면 시가 절로 나오지 않을까?"

고풍스러운 지훈의 작품 20여 편이 예쁘게 조각돼 있는 시공원을 둘러보는 마음이 여유롭다. '승무' '봉황수' '고풍의상' '낙화'…. 오랫동안 시를 잊고 살아온 탓일까? 모두들 학창시절의 추억에 잠겨 발걸음을 떼지 못한다.

버스는 다시 굽이굽이 산길을 돌아 첩첩산중으로 들어선다. 강원도 땅이 멀지 않다는 도로 표지판들이 조금은 낯설다. 영양에서도 가장 오지로 꼽히는 수비면 송하마을이다. '천연기념물 수리부엉이에게 해로운 행위를 하면 3년 이하의 징역이나 3천만 원의 벌금에 처한다.'는 무서운(?) 경고문이 마을을 둘러싼 산세와 제법 잘 어울린다.

"저희는 자주 봅니다. 밤에 마실갔다가 돌아가는 길에 보면 나무 위나 도로가에 앉아있지요." 권영도(67) 체험마을 대표의 마을 소개에 모두 귀를 쫑긋 세운다.

아이 낳은 집이라면 어김없이 내걸렸던 금줄 만들기는 전통을 잇는 시간이다. 연세 드신 마을 어르신들이 모두 나와 도시에서 온 고사리손들에게 새끼 꼬는 법을 가르친다. "예전에는 새끼 꼬아 신발도 만들고 가마니도 만들었어. 이젠 시골에서도 그러지 않지만…."

휘영청 보름달을 따라 다시 길을 나선다. 반딧불이천문대로 가는 길이다. 각종 민물고기와 곤충, 파충류가 전시돼 있는 생태학교를 둘러보고 천문대 옥상에서 가을 별자리를 찾아본다. 김지현(27·여) 학예연구사의 손길을 떠난 레이저 빛이 가리키는 곳에는 직녀, 견우, 카시오페이아가 환히 웃고 있다. "달이 너무 밝아 은하수를 볼 수 없어 아쉽네요. 다음에 올 때는 미리 공부하고 와야겠습니다." "별자리 관측은 겨울이 좋고 반딧불이는 여름에 와야 보실 수 있어요. 자주 놀러 오세요."

이튿날 아침, 서리가 추수 끝난 텅빈 들녘을 하얗게 뒤덮고 있다. 눈이 왔으면 더 좋으련만 아침 햇살에 빛나는 갈대밭도 감동을 주기에는 충분하다. 재작년 봄 씨앗을 뿌린 더덕은 땅 속에서 무럭무럭 자라있었다. 굵기가 고구마만한 녀석도 있다. 가느다란 나무막대 하나씩 쥐고 앉아 조심스레 땅을 파헤치는 모습이 마치 보물을 찾는 듯하다. "여보, 이것 구워 먹으면 술안주로 좋겠는데?" "당신은 맨날 술 생각만 해요? 호호호."

'음식디미방'이란 조선시대 요리서로 널리 알려진 안동 장씨 정부인의 흔적을 따라 두들마을을 둘러보고 집으로 향하는 길, 도시민들의 얼굴에서 새로운 희망이 엿보인다. "아빠, 우리 사는 곳 가까운 곳에도 이렇게 좋은 곳이 많은 줄 몰랐어요. 내년 휴가에 또 와요." "그래, 내년에는 물고기도 잡고 가재도 잡아보자꾸나."

이상헌기자 dava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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