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나와 너

한국 현대시에서 가장 많이 등장한 단어는 '나'였다. 한국학 중앙연구원이 1923~50년 창작된 한국 현대시 8천여 편을 대상으로 시어를 분석, 2일 출간한 '한국현대시어 빈도사전'에 따르면 대명사 '나'가 압도적이었다. 말하는 사람의 정서를 읊은 서정시가 많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다음으론 '가다' '이' '하다' '없다'와 '것' '그' '너' 등의 순서였다. 모두 나에게서 비롯되는 몸짓과 마음의 표현이었다.

나는 무엇인가란 질문은 철학은 물론 문학과 예술을 포함한 세상 모두의 관심사이자 풀기 어려운 숙제였다. 어린아이에서 어른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누구에게나 다가온 '나는 무엇인가'란 의문은 밤잠을 설치게 했다. 나를 찾아 고행의 길을 떠나는 구도자도 끊이지 않는다. 내가 생각하는 나와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나는 같지 않았다. 게다가 스스로에게조차 나는 이중적이고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아버지로서의 나나 부부로서의 나와 직장과 친구 사이에서의 나는 다른 얼굴이기 일쑤다.

매일 매일 이어지는 연속극 주제는 결국 인간관계다. 주인공 나와 다른 사람과의 사랑과 갈등, 애증과 욕망을 소재로 한다. 사람들은 사회생활의 가장 어려운 문제로 인간관계를 꼽는다. 그 덕에 인간관계의 마찰을 줄이기 위한 실천적 조언을 하는 책들이 쏟아진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처럼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나를 찾으라고 한다. 인간관계를 성공의 열쇠로 보는 이들은 상황에 따라 변신하는 카멜레온형 인간을 말하기도 한다.

나와 너의 관계를 희망과 꿈의 출발점으로 바라보는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관계를 설정하는 관점 자체의 전환을 요구한다. 나와 나의 수단으로 여기는 그것과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 함께 나아가는 '나와 너'의 관계를 강조한다. 관계는 혼자로는 불가능하다. 함께해야 하는 게 관계다. 함께할 때 열매를 건진다. 희망과 꿈은 그래서 함께 이루어야 한다고 말한다.

다시 새해다. 새 정부의 출발도 예고돼 있다. 모두가 희망과 꿈을 말한다. 그러나 좋은 관계는 언제까지나 이어지지 않는다. 나와 너가 아니라 나와 다른 그것과의 관계로 변질하는 탓이다. 시인 김춘수의 '꽃'은 이렇게 시작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서영관 북부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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