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풍]백년大計-백년河淸

사교육 전쟁과 같은 대입제도 변경, 모두 수재될 수 있다는 착각이 문제

대학입시 제도의 변경 또는 개혁은 현실적으로 사교육과의 전쟁이나 다름없다. 과열 과외로 대표되는 사교육이 날로 비대해져서 서민 가계를 짓누르고, 공교육은 속 빈 강정처럼 무력화되고 있는 비정상적인 교육 현실을 정상으로 돌려놓기 위한 전쟁이다.

하지만 그 전쟁에서 정부는 번번이 실패했다. 실패하다 보니 조령모개식 잦은 정책 변화가 또 다른 문제들을 가중시켜왔다. 최근 이명박 차기정부의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내놓은 '대입 3단계 자율화' 방안도 난공불락의 난제에 맞서는 또 하나의 새로운 도전일 뿐이다.

온갖 비난을 받는 노무현 정부의 대입제도와 시책들을 긍정적으로 보자면 사교육에 빼앗긴 교육을 공교육 쪽으로 돌려놓기 위한 몸부림이라 할 수 있다. 대학에 다반사로 강권을 행사하고, 수능 등급제와 내신 반영비율 등 여러 정책들을 새로 만들거나 수시로 변경해서 수험생'학부모들이 곤욕을 치르게 만들었지만 전혀 이해하지 못할 바도 아니다. 문제는 그렇게 해서 학생과 학부모의 부담이 줄었느냐 하면 결과가 그렇지 않은 데 있다.

학생들 사이에 회자된 '죽음의 트라이앵글'이란 말에 참여정부의 교육실정이 함축돼 있다. 수능은 수능대로 치르고, 내신도 잘 받아야 하고, 논술은 논술대로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입시 제도를 학생들은 죽음의 트라이앵글로 여긴 것이다. 최소 영'수'국 수능 과외는 기본이고, 학교에 매달리게 한 내신은 또 다른 과외를 불러들였다. 논술 역시 과외선생 없이 안심할 영역이 아니었다.

지독한 죽음의 트라이앵글이라 하더라도 최소한 사교육비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공교육 정상화의 가능성을 엿보이기라도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렇게 됐다면 교육소비자들은 수능 등급제의 불공정성을 양해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대다수 학부모들은 대학 자율화 논의보다 과외열풍에서 해방시켜 줄 대입제도 개선에 대한 열망이 훨씬 더 크다. 실제로 대학 자율을 막아 선 3불정책의 완전 폐지에 찬성하는 국민은 다수가 아니다. 대입을 대학 자율에 맡길 경우 공정성의 문제로 피해를 보게 되거나 사교육비 부담이 더 무거워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직인수위가 대학 본고사의 부활은 막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은 학부모들의 노파심을 읽은 결과로 보인다. 대학별 본고사가 부활한다면 '대입 3단계 자율화' 방안에서 제시한 수능 과목의 축소가 무의미해지고 사교육과의 전쟁에서 이미 지고 들어가는 것이 된다.

대입제도 변화가 추구하는 것이 단순히 사교육비 감축'공교육 정상화만은 아니지만 교육소비자들의 기대는 단순 명백하다. 최소한 현행보다는 대학입시 부담이 줄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교육 열풍에 등골이 휘지 않고도 대학에 갈 수 있는 제도를 원하는 것이다.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인수위 일각에서 거론한 특정 학년의 수업 전체를 영어로 진행하겠다는 발상은 문제의 핵심을 모를 뿐 아니라 지극히 위험한 발상이다. 현재도 과외의 핵심은 영어다. 고교에 영어 전용 학년을 만들면 나라가 온통 영어 과외 도가니가 될 것이 뻔하다. 영어는 이제 강요하지 않고 스스로 공부하게 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발상을 바꿔야 해법이 보인다. 자사고를 100개나 만들 필요가 있는지도 재검토해야 한다.

아이들이 모두 수재이거나 수재가 될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탁상행정식 정책 입안, 수월성의 목적지가 꼭 일류 대학뿐인 것처럼 믿게 하는 대학과 지식인들의 허세가 어쩌면 한국 교육을 백년대계가 아닌 백년하청으로 몰아넣고 있는지 모른다. 모두가 수재일 수 없고 수재일 필요도 없다. 수재가 아니어도 얼마든지 잘살 수 있다. 이런 인식이 선행돼야 문제가 풀린다. 이명박 정부의 실패하지 않는 백년대계를 기대한다.

김재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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