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나의 우생순은…

▶'나를 잊고 떠나는 여행의 희열'=한국화가 권기철(46)

앞으로도 무진장 많은 날이 남아 있는데 좀 뜬금없는 질문 아닐까? 나에게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란 여전히 끝나지 않은 미래의 일이다. 그래도 한 번 생각해 보면 혼자 여행 다니면서, 모르는 사람과 어울려 놀았던 때였던 것 같다. 그 중에서도 인도 여행은 너무나 기억에 남는다. 인도는 2001년부터 1, 2년 주기로 모두 네 차례 다녀왔다. 인도 여행하러 다니면서 '나를 없애는 것', '내가 없고 그냥 사람들만 있고, 그 속에서 익명으로 즐기는 자유'를 느꼈다. 일상으로 복귀한 뒤에는 생각도 자유로워졌다.

그게 다시 무뎌지면 돌아가고 싶을 땐 슬퍼져 '다시 간다.'고 결심했다. 인도인들과 '혼연일체'가 되는 경험은 인상적이다. 나의 숙소는 일반 가정집이었다. 짧게는 3일, 길게는 10일까지 머물며 그들의 삶을 느꼈다. 그것도 기차간이나 버스 안에서 만난 사람의 집에서였다. '내가 그림을 그린다.'거나 '나는 생활인이다.'라는 자체를 잊어버리고, 모든 것을 던져버렸다고 느낄 때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식구들이 보면 이기적이라고 보겠지만 사실은 사실이니 어쩔 수가 없다. 앞으로는 다른 것에서도 '행복한 순간'을 맛볼 수 있겠지만 나를 잊고 떠나는 여행에서 느끼는 희열만큼 강할 수 있을까?

▶'나이 서른이라는 마법의 순간'=직장인 김현승(30)

내가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서른'이 됐을 때이다. 다른 사람들은 예상밖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서른 살'이 큰 의미를 지닌다. 20대에는 계속 실패만 했기 때문이다. 나는 학교를 나와 직장을 다니는 남들과 달랐다. 개인적으로 하고 싶은 일, 꿈이 많았다. 내 휴대전화 액정화면의 문구가 '꿈이 있다.'이다. 그러나 이제껏 그 꿈은 다가서면 멀어지고, 될 듯하다가도 틀어지기만 했다. 생각해 보면 '어린 나이'라는 이유가 컸다. 그래서 나는 잠시 그 꿈을 미뤄왔다. 내 나이 스물아홉은 준비 과정으로 삼았고, 올해 서른이 됐다. '이제는 뭔가 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생겼고 그에 대한 책임감도 느낀다. 사람들도 이제 어리게 보지 않는다.

나이 서른이 되면 사람들은 보통 젊음이 가고 사회적 책임이 생긴다는 생각에 힘들어하지만 나는 다르다. 오히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제대로 하게 되지 않았는가. 지난해에는 와인과 인터넷 기반 사업을 벌이면서 사업의 주체로 활약했다. 이는 나에게 경제적 독립이라는 의미를 훨씬 넘어서는 의미심장한 일이다. 이를 통해 내가 진정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기 때문이다.

내 나이 스물한 살 때부터 꿈꿔왔던 페스티벌을 열고 문화기획자로 활약할 수 있게 됐다. 대구라는 '캔버스'에 밑바탕 칠을 했기에 이제 나는 그 위에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됐다. 20대 시절의 실패는 돈도 없었고 여러 가지 상황도 맞지 않았던 결과였던 것 같다. 이제 나름 경제적으로도 여유도 생겼다. '사회적 나이'도 됐다. '내가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어리다는 이유로 이루지 못했던 많은 것을 성취하게 해주는 나이 서른이라는 마법의 순간이다.

▶'내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그 순간'=나윤희(43·편집출판디자인회사 홍익포럼 대표)

각자 다른 일을 하는 대여섯 명이 오래 전에 '벨칸토'라는 이름으로 모임을 가졌다. 매주 수요일 저녁이면 만남의 시간을 가지고 지극히 개인적이거나 아니면 사회적인 문제를 두고 담백하고 즐거운 대화를 나누는 정도의 친목모임이었는데, 어느날 멤버 중 한 분이 하던 사업을 접고 영국으로 공부를 하러 가게 되었다. 치과의사이면서 엠네스티 한국본부의 일을 맡고 계셨고 우리 벨칸토 모임의 실타래를 풀어가는 구심점이었기에 그분의 '선언'이 특별히 놀라웠고, 무엇보다 생활이 보장돼 보이는 현실에서 내린 결단이 참 소신 있어 보였던 것 같다. 그즈음 나도 이직에 대해 고민이 많았던 터였는데 어쩐 일인지 몇 달 후 나답지 않은 '소신'으로 사표를 냈다. 그리고 늘 소망하던 바람대로 '출판편집디자인회사'를 창업했다. 참 쓸쓸하고 황량한 출발이었지만 내 의지를 현실화시키는 행운이 내게 일어난 것이다. 내 삶의 레노베이션은 헌 사무실 집기들을 구해 와서 하루 건너 한 번씩 페인트질을 네댓 번 하면서 시작됐다.

그리고 16년째로 접어드는 지금 편집디자인을 선택한 내 삶은 늘 분주하지만 항상 새롭다. 나는 손끝에 닿는 종이의 물성이 좋다. 그것으로 새로운 것을 만들고, 그것으로 사람과 사람을 소통시켜 주는 매체를 만들어낸다는 것이, 그리고 일선에 항상 내가 있다는 것이 참으로 기쁘고 감사하다. 나에게는 다행히 지칠 줄 모르는 건강이 있고, 98%가 부족할지라도 항상 '내게 부족한 건 2%뿐'이라는 자신감으로 내 안의 모든 것들을 에너지화할 수 있는 열정이 있으니까. 매일 아침 내 책상 위에서 '구상 중인' 수많은 일들이 새롭게 나를 반긴다. 곧 만개할 작업이 내 책상 위에 가득하다. 피곤이 쌓일 때로 쌓인 밤, 책상 위의 작업지시서를 비롯한 수많은 작업물들이 내 의식을 살살 흔들어댄다. 도처에 깔린 이 레시피들을 편집디자인이라는 것으로 잘 만들어내는 것이 나의 몫이다. 어쩌면 오늘 밤도 또 하얗게 새워야 할지 모른다. 하지만 어쩌랴, 나에게는 지금이 생애 가장 행복한 시간인 걸.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노력하는 순간들'=한성춘(56·외환은행 대구경북영업본부장)

우리가 살아가면서, 가끔은 내가 가장 좋았던 때가 언제였지? 또는 앞으로 정말 최고로 좋은 때가 올까? 과정이 더 중요한가? 결과가 더 중요한가? 그리고 생의 끝자락에서도 포기하고 싶지 않은 그 무엇이 있는가? 이 어려운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을 제시해 주는 영화가 '우생순'이었다. 우생순은 팀이 해체되었는데도, 우리 직장인으로는 직장이 폐쇄되었는데도 같은 운동을 좋아하는 이유 하나 만으로, 또 꼭 해야만 하는 절박한 이유 하나만으로, 뭉치고 훈련하여 올림픽 은메달이라는 값진 성과를 이루어낸다. 누가 알아주지도 않고, 기억하고 있지 않아도 진정으로 최선을 다했고 그녀들 스스로 최고의 순간을 만들어 갔기 때문에 그녀들은 행복했을 것이다.

이 영화를 한번 보고나면,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떤 일과 목표를 성취하지 못한 것을 남들보다 내 상황이 더 어렵다는 탓으로 돌리곤 했던 핑계를 다시 한번 더 생각해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의 삶에는 올림픽처럼 결승전이 따로 있는 경우가 거의 없다. 매일의 노력이 쌓여서 실적 또는 결과가 나타나기 때문에 매일 그리고 매순간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영업으로 본다면 각자 고객유치, 경쟁상대를 이기기 위한 전략수립, 대책 강구 등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순간 그때가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며, 그 결과가 1등이면 좋고, 2등이라도 아쉬울 것이 없으며, 설령 꼴찌라도 상대방에 박수치고 다음에 더 분발하면 될 것이다. 나 역시 은행인으로, 아마추어 마라토너로 지치고 힘들 때가 있지만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 바로 최고의 순간이다.

▶'상상을 현실로 만든 짜릿했던 그 순간'=전충훈(35·대구지역문화산업연구센터 사무국장)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내는 일만큼 짜릿한 게 있을까. 아무도 시도하지 않는 새로운 문화콘텐츠를 만드는 일. 그만큼 어렵고 괴로운 과정이지만, 성공의 기쁨은 무엇보다 짜릿하다. 특히 지난 2006년 8월 열린 대구 e펀에서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희열감을 느꼈다. 당시 e펀 콘텐츠 기획을 하던 나는 대구 도심에서 RPG 게임(Role Playing Game: 역할 수행 게임)을 펼쳐보겠다는 구상을 했다. 게임이 '골방에서 즐기는' 놀이라는 편견을 깨고 사람들이 열린 공간에서 진짜 사람들과 협력을 통해 게임을 즐기자는 색다른 시도였다. 쉽지 않았다. 누구도 해보지 않았기에 벤치마킹을 할 곳도, 함께할 사람을 구하기도 어려웠다. 8개월의 준비기간 동안 숱한 밤을 하얗게 지새워야 했다. 참가자들에게 게임 방법을 설명하는 게 더 어려웠을 정도였다. 동성로에서 펼쳐진 '도심RPG'의 열기는 뜨거웠다. 기획자의 손을 떠난 게임은 참가자들을 통해 재생산되고 재미는 점점 커졌다. 참가자들은 자체적으로 팬클럽을 만들었고 자신들의 블로그에 '공략법'을 올릴 정도로 열의를 보였다. 그 때 느꼈던 쾌감을 생각하면 지금도 머리 끝이 짜릿할 정도다. 이제는 천안, 안동, 김해, 서울 등 타도시에서 벤치마킹을 시도하고 있다. 문화콘텐츠를 잘 기획하고 잘 만드는 사람이라는 평가는 자연스레 따라왔다. 행복의 순간은 홀로 이뤄내는 것이 아니라 나를 아껴주고, 이끌어주는 사람이 있기에 맛볼 수 있음을 다시 깨닫는 순간이었다.

▶'내 공간, 내 집이 생겼을 때의 그 기쁨'=정정미(35·주부)

1999년, 스물다섯이라는 어린 나이에 결혼을 했으니 벌써 결혼 10년 차가 됐다. 전문대를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다 동료의 소개로 만난 남편. 2년을 넘게 만나다 덜컥 임신을 하면서 예상보다 결혼을 서둘러야 했다. 넉넉지 않은 살림에 '크게 시작할 거 뭐 있냐.'며 시작한 시집살이. 1년 동안만 시댁에서 살다 나오자 했지만 맞벌이와 아이 양육 문제가 걸리면서 분가는 차일피일 미뤄졌다. 낯선 시댁 어른들과의 생활은 조심스럽기만 했다. 옷차림부터 말투, 행동이 어른들의 눈밖에 날까, 마음을 상하게 하진 않을까 이만저만 마음이 쓰이는 게 아니었다. 신혼인데도 남편과 애정표현 한 번 제대로 못하니 아쉬움은 더했다. 그렇게 지낸 5년. 어른들의 허락을 받아 내 집 마련에 나섰고 드디어 북구 동변동의 한 임대아파트에 당첨이 됐다. 23평짜리 작은 집이지만 '내 집'이 생기고 분가를 하게 됐다는 사실에 뛸 듯이 기뻤다. 밥을 안 먹어도 배불렀고, 하릴없이 실실 웃음이 났다. 하루하루는 미래에 대한 기대와 행복으로 넘쳤다. 분가한 지 4년이 지나면서 사실 그 당시의 행복감은 사실 많이 줄어들었다. 시댁에서 살 때보다 많이 게을러졌고, 아이를 맡길 곳이 마땅치 않은 탓에 퇴근 후에는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생활비 부담도 더욱 커졌다. 행복이 현실을 만나면 바람이 새는 풍선처럼 쪼그라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할까. 하지만 당시 느꼈던 행복감만은 영원히 마음 속에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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