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계산논단] 미래지향적 한일관계

1938년 11월 작가 김동인(金東仁)은 제 발로 총독부 학무국을 찾아가 '황군 위문'을 자청했다. 1939년 4월 김동인은 박영희(朴英熙)·임학수(林學洙) 등과 함께 '황군위문작가단'을 조직해 '성전종군작가(聖戰從軍作家)'라고 쓴 어깨띠를 두르고 황군위문길에 나섰다. 내친김에 그는 1944년 도쿠가와(德川) 막부 시절의 이야기를 담은 역사소설 '성암(星巖)의 길'을 쓸 정도로 적극적인 친일파가 되었지만 그 시작은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사건에 있었다. 서울 지역의 수양동맹회와 평양 지역의 동우구락부가 1926년 통합해 결성한 수양동우회는 안창호 계열의 계몽적 민족주의 단체였다. 무실(武實)·역행(力行)·신의(信義)·용기(勇氣)의 4대 정신으로 덕육(德育)·체육(體育)·지육(知育)을 수련해 건전한 인격을 함양하면 우리 민족이 재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온건 민족주의 세력이었다. 그러나 일제는 1937년 6월부터 돌연 수양동우회원 검거에 나서 181명을 검거한다. 1941년 11월 경성고등법원에서 전원 무죄판결이 내려져 사건은 종결되지만 4년여의 구금 기간 중 최윤세(崔允洗)·이기윤(李基潤)은 옥사하고 김성업(金性業)은 불구가 될 정도로 가혹한 고문을 받았다. 병약했던 김동인은 '문단 삼십년의 자취(1967)'라는 글에서 자신은 '감옥에 들어가면 당장 죽는다'는 생각에서 스스로 총독부를 찾아갔다고 고백하고 있다. 고문의 공포 때문에 스스로 총독부 학무국을 찾아갔던 것이다.

1939년 11월 일제는 조선민사령(朝鮮民事令)을 개정해 창씨개명(創氏改名)을 강요했다. 창씨 개명을 거부하면, 비국민·불령선인으로 분류되어 사찰 대상이 되었고, 자녀들의 각급 학교 입학과 진학이 거부되었으며, 공사기관 채용이 거부되었고, 행정기관의 모든 민원사무의 취급이 거부될 뿐만 아니라 식량 및 물자 배급에서 제외되고, 우선적인 노무징용 대상자로 지명되었다. 처음 3개월 동안 7.6%에 불과했던 창씨 개명 비율이 마감인 1940년 8월까지 79.3%에 달했던 것은 이런 강제 조치 때문이었다. 나아가 조선어 교육을 폐지하고, 일본어의 사용을 강제해 초등학교들도 조선어를 사용하면 벌을 받았다.

1942년 3월에 발생한 '성서조선(聖書朝鮮)' 사건은 일제의 사상 탄압의 강도를 잘 말해준다. 김교신(金敎臣)이 '성서조선'에 쓴 '개구리를 조상함'이란 뜻의 '조와(弔蛙)'라는 글 때문에 김교신과 함석헌·송두용·유달영 등 열두 명이 투옥된 사건이다. "오랜만에 친구 와군(蛙君:개구리)들의 안부를 살피고저 속을 구부려 찾았드니, 오호라, 개구리의 시체 두세 마리 담꼬리에 부유하고 있지 않은가! 짐작컨대, 지난 겨울의 비상한 혹한에 적은 담수(潭水)의 밑바닥까지 얼어서 이 참사가 생긴 모양이다. 예년에는 얼지 않았던 데까지 얼어붙은 까닭인듯. 동사(凍死)한 개구리 시체를 모아 매장하여 주고 보니 담저(潭底)에 아직 두어 마리 기어 다닌다. 아, 전멸(全滅)은 면했나 보다!" 못 아래에 개구리 두어 마리 기어 다니는 것을 보고 '아, 전멸은 면했나 보다'라고 감탄한 것이 독립 정신을 고취시켰다는 것이 사건의 배경이다. 같은 호에 실린 '부활(復活)의 춘(春)'이란 글에서 김교신은 "우리의 소망은 부활에 있고, 부활은 봄과 같이 확실히 임한다"라고 썼는데, 이때의 부활 역시 민족의 부활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1941년 2월에는 조선사상범예방구금령을 공포했는데, 아무런 위법행위가 없지만 의심만으로 예방 차원에서 구금할 수 있다는 법이었다.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영구히 지배하기 위해 이렇게 물리적·정신적 테러를 가한 경우는 다시 찾기 어려울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금년의 3·1절 기념식에서 '미래 지향적 한일관계'를 강조했다. 당선자 시절에는 일본 국회의원들에게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미래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고도 보도되었다. 그러나 '미래지향'이라는 말이 '잘못된 과거' 망각의 수단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했던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 일본 총리는, "과거의 역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겸허한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일본이 과거의 역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한다면 통절한 반성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진실한 반성이 전제된다면 두 민족은 자연히 미래를 지향하게 되어 있다. 미래는 진공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과거라는 구체적 토대 위에 만드는 현실이 쌓인 모습일 뿐이다.

이덕일 역사평론가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