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더불어 하나되어야 할 자연

지난달 말 직장 동료 몇분과 함께 지리산 천왕봉을 등반했다. 승용차를 놔두고 시외버스를 타고 가다 보니 차 시간이 맞질 않아, 시골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술도 한잔 마시고 어묵도 사 먹고 하다 보니, 빡빡한 산행이 아니라 그야말로 만유(漫遊)가 되어 버렸다. 하기야 바쁜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자연과 하나가 되기 위해 산을 오르는 것이 등산의 본질이니, 이번 산행이야말로 극히 이상적인 산행이었다고 할 수도 있겠다.

2월말의 지리산은 두 계절을 동시에 맞고 있었다. 산 아래 마을에는 벌써 꽃망울이 맺히기 시작했는데, 산꼭대기에는 아직도 발목이 푹푹 빠질 만큼 눈이 쌓여 있었다. 그래서 이산 김광섭 시인도 노래하지 않았던가. '산은 언제나 기슭에 봄이 먼저 오지만 / 조금만 올라가면 여름이 머물고 있어서 / 한 기슭인데 두 계절을 / 사이좋게 지니고 산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눈도 다 녹고 꽃들이 다투어 피었다 지고나면 곧 짙푸른 녹음이 온 산을 뒤덮을 것이다.

등산을 시작한 것은 1980년, 나를 등산에 입문시킨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신군부정권이었다. 모든 대학에 휴교령이 내리고 계엄군의 장갑차가 교문을 지키고 있던 그해 여름, 갈 곳이 없었던 나는 서울에서 내려온 친구 몇명과 함께 작당하여 무작정 지리산 노고단에 올랐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또 다른 세상과 운명적으로 만나게 되었다. 노고단 아래 펼쳐진 운해(雲海)와 그 구름바다를 붉게 물들이며 서서히 사라져가는 낙조(落照). 나의 두 눈에서는 소리없이 눈물이 흘렀고, 나는 '사라지는 것의 아름다움'을 그때 처음 알았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을 가슴에 간직하며 이 산 저 산을 오르다 보니 벌써 등산 경력 30년이 다 되어간다.

등산은 참 좋은 운동이다.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 가도 좋고 조용히 생각에 잠기며 혼자 가도 좋다. 화창한 날의 산행도 좋지만 촉촉이 비 내리는 날의 운치 있는 산행도 좋다. 남과 겨루어 이겨야 하는 경기가 아니므로 굳이 무리해서 빨리 걸어야 할 필요도 없다.

근래 들어 산을 찾는 인구가 부쩍 늘었다. 검은색 등산 바지 한 벌 없는 사람이 없으며, 단풍철에는 등산객들로 등산로 정체 현상까지 나타나니, 등산은 그야말로 전 국민의 사랑을 받는 국민스포츠가 된 셈이다. 다만, 등산화를 신지 않고 슬리퍼나 구두, 하이힐을 신고서 산에 오시는 분들, 패션쇼라도 하려는지 고급 외제 브랜드 등산복으로 치장한 분들, 산에 와서 고기 굽고 술 마시는 분들, 자기 쓰레기 되가져가지 않는 분들, 그리고 산에서 담배 피우시는 분들. 이런 분들만은 제발 산에 오지 마시길 간곡히 부탁드리고 싶다. 산은 우리가 '정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더불어 하나 되어야 할 자연'이기 때문이다. 변준석(시인·영진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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