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에서 성주로 빠지는 30번 국도를 따라 가다보면 들녘에 도열한 비닐하우스를 접하게 된다. 탱탱하게 당겨진 비닐 지붕에 햇살이 내려앉아 반짝거리는 모습은 봄의 약동을 알리는 메신저와 같다.
도중에 만난 성주댐은 지난 겨울의 한기를 아직 못다 삭힌 듯 서슬 퍼런 물빛을 담고 있다. 이 댐을 휘돌아 대가천을 따라 김천 방향으로 길을 잡으면 사인암과 입암이 봄을 좇는 사람들을 맞는 구흘구곡이 펼쳐진다. 두 거대바위 밑 양달이 든 곳엔 쑥과 냉이가 고개를 살포시 내밀고 있다.
상큼한 봄의 미각을 머릿속에서만 그리며 아쉬운 길을 더 재촉하면 김천 증산면 평촌리에 다소곳이 숨어있는 천년 고찰'불령산 청암사'와 인근 수도산 자락에 솜씨 좋은 마을 어르신들이 운영하는 농촌 테마마을인'김천옛날솜씨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청암사는 수줍음이 많은 절이다. 작은 일주문 뒤로 아름드리 상록수가 숲을 이뤄 사찰의 전각이 쉬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신라 말 도선국사가 창건한 이래 비구니를 위한 강원(講院)의 맥을 잇고 있어서인지 고즈넉하기 그지없다.
왼편으로 봄을 알리는 물소리가 한창인 계곡을 따라 폭신한 흙길을 밟으면 경내로 들어선다. 어느 절에나 있을법한 천왕문 안엔 조각상 대신 그림으로 된 사천왕상이 속세의 삿된 범접을 경계하고 있다. 불령산에서 흘러내린 계류가 두 갈래로 갈라지는 지점에 위치한 청암사는 마치 절터를 인위적으로 조성했다기 보다는 뻗어 내린 산자락이 빈틈을 보인 곳에 건축물을 세운 독특한 구조다.
첫 지점에서 만난 조계종 대종사 고봉당태수대화상비명과 고봉탑은 푸른 이끼가 고이 내려앉아 한결 고풍스런 멋을 지닌다. 불교적 진리의 상징인 흰 코끼리가 서로 마주보는 상이 도드라진 비명과 화려한 문양이 양각된 고봉탑은 청암사가 천년 고찰임을 웅변하기에 모자람이 없다.
이윽고 중생의 어리석음을 쫓는 여래음 같은 목탁소리에 이끌려 경내로 들자 목어'운판'법고'범종을 두루 갖춘 범종각의 고운 단청빛깔이 아름다운 자태로 눈에 들어온다. 이 곳에서 극락교를 건너면 율원과 다중석탑, 대웅전이 대나무 숲을 병풍삼아 자리하고 있다.
2단의 석축기단 위에 정면과 측면 각 3칸 양식에 팔작지붕을 얹은 대웅전은 단청이 많이 벗겨져 있어 보기에 따라 회화적 가치를 높여 주고 있다. 이 때 뒤편 대나무 숲이 한번 크게 몸을 흔들자 전각의 용마루 끝에 달린 풍경에서 청아한 금속성이 울려 퍼진다. 대웅전 안엔 기둥 2개를 세워 불벽을 치고 불단을 꾸몄다. 불벽 뒤로는 탱화가 걸려 있다.
성주의 한 논바닥에서 옮겨놓은 다층석탑은 기단이 좁고 비례가 맞지 않아 가냘프고 불안정하게 보이지만 비구니들의 수행 사찰로 그 처연함이 외려 구도정신에 걸맞은 느낌이다.
스님들의 동안거(겨울 동안 승려들이 한곳에 모여서 도업을 수행하는 것) 수행에 방해가 될까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겨 찾은 곳이 극락전이다. 앞뜰에 목련이 굵은 꽃망울을 머금고 있는 청암사 극락전은 사찰 전각이라기 보다 여염집 형태를 하고 있는 듯하다. 은연 중 왕궁의 건축양식이 배어있는 듯 해 연유를 찾아 봤더니 바로 이곳에서 조선 19대 숙종의 계비인 인현왕후가 폐비 시절 3년간 머물렀다고 한다. 왕후는 여기서 매일 지극정성을 들여 마침내 복위하게 된다.
절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계곡과 자연에 순응한 건축양식, 빛바랜 단청의 대웅전과 새롭게 단장한 범종각의 강렬한 단청, 세속의 여염집을 닮은 극락전 모습이 승(僧)과 속(俗)의 경계를 아우르는 청암사는 그래서 꼭 한 번은 들러볼만한 고찰이다.
높다란 느티나무 두 그루가 마을 수호나무마냥 우뚝 솟은 김천 옛날솜씨마을은 동네 어르신들이 저마다 시골생활에서 익힌 재주 한가지씩을 갖고 동네를 찾는 방문객들과 즐거운 한 때를 마련한다.
26가구 50명의 주민 중 16가구가 참여해 부근 수도산에서 흘러내린 마을 앞 개울과 좁다란 논둑길, 산과 들을 모두 체험공간화 한 이곳은 시골 정취와 추억을 되새길 수 있는 프로그램을 통해 메마른 도시생활에 지친 사람들에게 활력을 주기에 안성맞춤이다.
탱자나무와 흙담으로 둘러싸인 마을 안 체험장의 짚풀공예전시관에는 계란 꾸러미와 씨앗을 뿌리는 작은 망태기에서 소형 지게까지 다양한 옛날 생활용품을 비치해 놓아 교과서나 사진에서만 보던 옛사람들의 공예품을 관람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마을 어르신들이 가르쳐주는 대로 뭐든지 만들어 볼 수도 있다.
그러다 지치면 가마솥에 장작불을 피워 찐빵을 쪄먹거나 디딜방아로 곡식낱알을 빻아볼 수도 있고, 멍석을 펴고 제기나 투호 등 전통놀이를 즐길 수 있다.
특히 계절별로 봄에는 쑥이나 산나물 채취, 여름엔 임시 수영장에서의 물놀이 또는 옥수수'감자 캐기, 가을엔 고구마 캐기, 겨울엔 썰매타기 등 도심에서는 좀체 하기 힘든 다양한 체험거리를 맛볼 수 있다.
체험거리는 그날그날 어르신들의 사정과 형편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나 연중무휴로 운영되고 있어 유치원생이나 초등생들의 단체체험 장소로 제격이다.
필요한 재료를 하루 전에 준비해야 하기 때문에 옛날솜씨마을에서 테마체험을 하려면 하루 전에 예약해야 한다.
15명 이상 기준 식사 포함 1박2일에 어른 3만5천원, 어린이 3만원. 당일체험은 오전 10시~오후 3시30분사이 3개의 프로그램 체험을 기준으로 1만5천원선이다. 문의는 054)437-0150.
♣가는길
대구에서 성주 방면 30번 국도를 따라 성주대교를 지난 후 성주읍 외곽을 돌아 대황삼거리에서 김천'무주방향으로 들어선다. 이어 성주댐을 거쳐 무흘구곡을 지나 김천 방향으로 직진하다보면 왼편에 커다란 청암사 표지석이 나온다. 옛날솜씨마을은 청암사 드는 길에서 왼쪽 농로로 가면 보인다.
♣먹을 곳
지례흑돼지 왕소금구이
김천 지례면에 있는 상부가든(054-435-0247)은 지례흑돼지를 이용한 왕소금구이와 주물럭, 삼겹살이 맛있는 집이다.
우윳빛 지방이 고루 섞인 흑돼지의 목살만 떼 내 두툼하고 큼직하게 썬 다음 굵은 소금을 뿌려 구워 먹는 왕소금구이는 육즙이 풍부하고 육질이 고소해 인근 김천과 구미, 대구 등지에서 단골들이 많이 찾는다. 껍질째 나오는 삼겹살과 목살'삼겹살을 반씩 섞은 주물럭은 특히 여성과 아이들이 좋아하는 메뉴. 고기는 모두 24시간 저온숙성시켜 질기지 않고 씹는 맛이 부드럽다.
주인 권영숙씨가 권하는 지례흑돼지 맛있게 먹는 법은 먼저 왕소금구이를 사람 수 보다 약간 적게 주문해 맛본 뒤 나머지 몫을 주물럭이나 삼겹살로 주문하면 제대로 된 지례흑돼지의 맛을 즐길 수 있다는 것. 고기 먹은 다음엔 시원한 열무국수'냉면은 느끼함을 가시게 한다. 왕소금구이'주물럭'삼겹살 1인분 200g기준 6천원. 열무'냉면은 각각 3천원. 지례에는 식당 20여곳에서 지례흑돼지를 판매하고 있다.
우문기기자 pody2@msnet.co.kr
사진 정재호기자 newj@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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