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계산논단] 엽기를 권하는 사회

'엽기'가 유행이다. 방송에서, 신문에서, 틈새만 있으면 '엽기'를 소개하고 찬양하고 따라배우기에 앞장서고 있다. 특히 어린 청소년을 필두로 대중들이 쉽게 따라하는 오락프로그램에서 엽기가 유행이다. 그런데 그 엽기적 유행도 습관이 되면 위험천만한 현실생활로 둔갑하곤 한다.

작금의 살인사건들이 그러하다. 전직 야구선수에게 전 가족이 몰살당하여 암매장된 사건이 어제 같은데 실종되었던 두 어린이가 끝내 사지가 잘린 채로 발견되었다. 예전에도 엽기적 살인사건이 없던 것은 아니라 이런 식으로 사건이 빈번하다 보니 가히 '엽기의 시대'라 할만하다. '엽기의 일상화'가 진척되고 있다.

하드코어 성인물은 그렇다 치고 아동성학대류의 포르노물이 인터넷에서 횡행한다. 어느덧 어린이들 자체가 성적 노리개의 상품으로 올라 있다. 잔혹한 살인, 암매장 및 생매장, 시신 난도질 따위의 엽기들이 온갖 매체에서 날로 번성하고 있다. 방송에서 온갖 엽기적 행각에 대한 관용(?)을 배운 터라 받아들이는 이들도 무덤덤하다. 습관의 사회화가 진척되었기 때문이다.

사회 도덕교육을 담당할 종교계 자체가 타락하였으니 다중은 의지할 곳이 드물다. 그렇게 종교인구가 많은 한국에서 가장 비종교적으로 생활하는 곳 또한 우리다. 사회의 엽기화를 방어할 수 있는 기초교육이 이루어져야할 가정이 복잡다단하게 해체되고 있고, 학교는 이미 제 역할의 상당 부분을 사설 학원에게 넘겨주고 전인교육은 액자에 담겨진 구호로만 걸려있을 뿐이다.

상위권 5%미만의 대학진학을 위하여 모든 학생들이 새벽별보기 운동을 해야하고, 그런 와중에 전인교육 따위는 실종된 지 오래이다. 토스토에프스키의 '죄와 벌'을 읽으면서, 시베리아의 추운 들판으로 상상의 여행을 함께 떠나던 예전의 고등학교 시절은 상상도 할 수 없다. 감수성이 가장 예민할 나이에 올바른 독서와 교양으로 기초소양을 쌓아야할 청소년들이 입시지옥탕으로 내몰리는 탓에 학원가를 배회하다가 아무런 방어책 없이 대학으로 넘겨진다. 이런 걸 두고서 '공부 잘 한다'고 한다.

그렇게 '대충' 넘겨받은 대학은 어떠한가. 영어배우기 열풍과 이러저러한 취직시험, 고시공부, 자격증 따기 등에는 몰입해도 인간의 기초적 수양을 공부하는 인문학 따위는 안중에 없다.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아이들의 인생에서의 열패감은 또 어떨까. 학교교육에서 제대로 해내지 못한 전인교육의 실패를 사회에서 만회할 방법이 없다. 한국사회가 위험사회임을 잘 말해준다.

정부는 어떠한가. 실용과 경제만 강조되는 사회에 편승하여 신드롬만 쫓게 한다. 경제만으로 그 모든 문제들이 해결될까. 돈은 왜 버는가부터 생각해보자. 그야말로 '잘 먹고 잘 사는' 것 때문이 아닌가. 그런데 그 잘 먹고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스트레스 덜 받고 천천히 사는 삶, 교통안전은 기본이고 사회 인프라 전반의 안전성, 온갖 폭력·유괴·강간·살인사건 따위의 만연에서 벗어나 한결 안전한 사회, 그리하여 공동체 전체가 함께 도모하면서 천천히 살아가는 삶이 아닐까.

부잣집동네를 가면 대개가 그렇듯이 담장이 높고 경비업체 없이는 살 수가 없다. 불안한 것이다. 오늘의 한국은 서구 같은 부잣집은 아니되, 제법 살만한 나라로 분류되고 있다. 그런데 담장 쌓고 경비업체 없이는 살 수 없는 사회가 된지 오래이다. 낙동강에 번번이 극약물이 엎지러지고, 새우깡에서 생쥐머리가 튀겨진 채 나오는 사회에서는 결코 저 혼자 잘 먹고 잘 산다고 해결될 수 있지가 않다.

자녀들의 귀갓길에 혹시라도, 부질없는 기우를 기우로서만 치부할 수 없는 게 한국사회다. 백주 대낮에 사라진 꽃 같은 아이들이 팔다리 끊긴 채 강물에 둥둥 떠다니고 암매장된 채 나타나는 사회다.

보고 들은 것이 없고, 오로지 엽기를 권하는 사회적 법도만을 배워왔으니 살인조차도 엽기로 끝나고 만다. 단순 우발적 살인은 이제 더 이상 '재미'가 없어졌다. 팔다리 잘린 괴물을 원하는 것이다. 극중에서 보았던 그 괴물들이 우리들이 살고 있는 동네 공원으로, 골목길로, 광장으로 거침없이 진출하고 있다. 빙허 현진건이 '술 권하는 사회'라고 당대 식민사회를 질타했다면, 오늘의 한국사회는 '엽기 권하는 사회'라고 부를까. 이런 엽기적 풍경을 구경만하고 있을까. 정부나 정치권 어디서도, 오로지 총선에만 올인하고 있을 뿐, 우리들의 진정한 민생은 안중에도 없다. 이런 비정상적인 사회가 또 있을까.

주강현(한국민속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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