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아 ~~ 아 아 ~~ 마이쿠 테스트. 아 아~~ 아 아 ~~ 마이쿠 테스트... 아 아~~ 마을 이장입니다. 올 아침에 동민 여러분들께 알려 디릴게 있습니더…."
칠곡군 왜관읍 왜관1리. 이른 아침나절부터 동네에서 가장 높은 건물 꼭대기에 동서남북으로 매달린 4개의 확성기가 쩌렁쩌렁 울린다. 이 마을 이장이 군청이나 읍사무소의 각종 공지사항을 전달하는 목소리다.
방송내용은 정전과 단수가 몇시부터 시작되고, 적십자회비를 언제까지 내야하며, 영세민 취로사업이 어디서 이뤄진다는 등등. 시시콜콜한 것 같지만 주민들에겐 더 없이 중요한 정보다.
600여 가구에 1천900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왜관1리 마을의 이상조(73) 이장. 선친으로부터 이장직을 물려받아 올해로 35년째 대를 잇고 있다. 그는 경북도내는 물론 전국의 이장중에서도 '왕고참'으로 통한다.
"5·16 군사정변이 나던 해에 군에서 제대를 하고 돌아와 선친에게 어깨너머로 동네일을 배웠지. 박정희 정권의 10월유신 이듬해인 1973년도에 자리(이장)를 물려 받았어. 벌써 30년이 훌쩍 넘었구먼. 세월이 유수 같다더니 정말이야 허허…."
1958년부터 이장을 맡았던 선친의 이장생활 15년을 합치면 무려 50년. 한 마을의 이장을 반세기 동안이나 남 줄것 없이 부자지간이 다 해먹은(?) 셈이라며 겸연쩍어 한다. 이장자리를 30년 넘게 장기집권 하기까지 남모르는 노력도 했단다.
각종 문서를 수기로 작성해오다 보니 '아날로그 이장'이라는 소리를 들을까봐 컴퓨터 실력도 나름대로 쌓았다는 것. 대를 이은 이장 집안답게 자신만만한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는 것이다.
한 동네를 책임지는 마을 이장. 지난시절 예금통장과 도장을 아예 통째로 맡기고, 갓난 아기의 작명(作名)까지 부탁할 정도로 마을 이장에 대한 신뢰는 대단했다고 한다. 아무리 젊은 나이의 이장이라도 마을의 어른으로서 깍듯이 존경받았다는게 그의 회고담이다.
남북대치의 전유물인 야간 통행금지(통금) 시절 얘기를 꺼내면서 이장님의 목소리 톤이 자꾸만 높아진다. 통금에 걸려 파출소나 지서에 붙잡힌 마을 주민들을 이장이라는 신분 하나로 빼내 올 수 있는 권한도 누렸다며 더욱 신명을 낸다.
18대 총선을 눈 앞두고 있다보니 이번에는 선거 얘기로 화제를 돌린다. "거짓말을 좀 보태서 말한다"고 전제한 그는 "이장들이 선거 판세를 쥐락펴락할 때가 많았지. 누구는 어느편이라는 식으로 선거분석을 해서 상부에 보고를 했는데 거의 90% 정도는 맞아 떨어졌다"며 자랑을 늘어 놓기도 한다.
"지지후보의 득표율을 높이기 위해 거동을 못하는 환자를 둘러업고 부랴부랴 투표장으로 달려갔지만 막상 상대편 후보의 유권자를 데리고 왔다고 심한 질책을 받은 적도 있다"며 "지금은 전혀 통하지 않는 그저 옛날 얘기일 뿐"이라고 지그시 눈을 감는다.
2004년 전국 이장협의회 중앙회 부회장을 맡으면서 전국 통·이장의 기본수당을 월 10만원에서 20만원으로, 회의수당을 2만원에서 4만원으로 각각 100% 인상하는 문제를 관철시킨 일은 이장으로서 내세울만한 업적이라고 스스로를 치켜세운다.
1980년대 초반 쯤. 어릴 때 식구들과 헤어져 고아원과 공장, 식모살이로 이리저리 떠돌아 다니다 결국에는 왜관 미군부대 군인들을 상대로 접대부 생활을 해오던 20대 여성의 가족들을 약 3개월 동안이나 수소문해 찾아준 일도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게 사정이 달라졌다고 한다. 이장으로서 전성기였던 1970, 80년대. 모든게 궁핍했지만 주민들끼리 서로 오순도순 나눠먹고 걱정도 함께했는데, 요즘에는 너무 개인적으로 흘러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불편을 준다고 느껴지면 서슴없이 판을 뒤집어 버린다는 것이다.
"있는 사람이 더 한 세상이지요." 읍내 시장통에 상가가 있고, 수 십억원에 달하는 재산, 고급외제 승용차를 몰고 다니는 부자가 몇 십만원에 불과한 자동차세를 내지 않고 체납하는 바람에 이장이 골탕을 먹는게 요즘 세태라고 혀를 찬다.
"적십자회비 고지서를 전달하러 갔는데 한 젊은 새댁이 이장이 보는 앞에서 '북한에 퍼주기만 하는 적십자 회비'라며 고지서를 그대로 찢어 휴지통에 쑤셔박아 버립디다…." 그는 이제는 젊고 유능한 후배에게 물려주기 위해 적임자를 물색하고 있는 중이라고 귀띔했다.
칠곡·김성우기자 swkim@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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