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시내에서 안동댐으로 가는 길 이름이 '석주로'다. 상해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石洲(석주) 이상룡 선생의 호를 딴 멋진 길이다. 올라가는 길 왼쪽에는 국보 16호인 신세동 7층 전탑과 함께 臨淸閣(임청각)이 떡 하니 자리 잡고 있다. 선생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임청각은 지금은 중앙선 철로가 앞을 가로지르는 바람에 많이 퇴색했지만 원래 99칸이었으며 안동에서 가장 오래된 민가로 알려져 있다.
석주는 경술국치를 당하자 "나라가 없는데 조상 제사를 지내는 것 자체가 도리가 아니다"라며 집안을 정리하고 1911년 1월 식솔과 함께 압록강을 건넌다. '삭풍은 칼보다 날카로워 나의 살을 에는데/ 살은 깎여도 참을 수 있고/ 창자는 끊어져도 아프지 않다. 그러나 내 밭, 내 집을 빼앗고/ 또다시 내 처자를 넘보니/ 차라리 이 머리가 잘릴지언정/ 내 어찌 무릎 꿇어 종이 되겠는가.' 라는 유명한 去國詩(거국시)를 남긴다.
그는 서간도 신흥무관학교에서 독립군 양성에 평생을 바쳤다. 그의 수발을 돕던 손자며느리 허은씨는 몇 년 전 간행된 회고록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에서 당시의 어려움을 이렇게 서술했다.
"고향에서는 양반이라고 말고삐나 잡고, 京鄕(경향)간 내왕이나 하며 글을 읽던 분들이 생전 해본 적도 없는 화전 농사를 직접하자니 고달프기 짝이 없었다. 식수로는 도랑물을 먹었는데 그해 오뉴월이 되자 그 물 때문에 동네 사람들 모두가 발병했다. '수토병' 또는 '만주열'이라고 했는데 석 달간 전염병이 나돌아 노약자는 물론 젊은 사람도 많이 죽었다."
이런 석주 선생을 비롯한 신채호, 홍범도, 이상설 같은 독립운동가 200여명이 관련법규 개정으로 대한민국 국적을 얻게 된다는 반가운 소식이다. 이들은 일제가 식민통치를 위해 호적제를 개편하자 일본 호적에 이름을 올릴 수 없다고 거부했고, 광복 후 정부는 일제강점기때 호적에 등재된 사람에게만 대한민국 국적을 부여하는 바람에 그동안 호적 없는 무국적자 신세가 된 것이다.
"국토가 수복되기 전에는 나의 유해를 고국 땅에 묻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석주 선생은 1932년 이국땅에서 눈을 감는다. 그의 유해는 광복 한참 뒤인 1990년에야 고국 땅을 밟았다. 그리고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한 것은 그의 사후 76년만의 일이다.
윤주태 논설위원 yzoote@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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