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조선에는 결코 넘을 수 없는 장벽이 있다"

소년, 아란타로 가다/설흔 지음/생각과 느낌 펴냄

조선의 천재시인 이언진은 27세에 요절했다.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한 박지원은 '우상전'이라는 글을 써서 그를 추모했다. 이언진은 실존 인물이며 중인 출신으로 시문에 능했다.

이 소설 '소년, 아란타로 가다'는 이언진이 1763년 일본의 새로운 쇼군 취임을 축하하기 위해 파견된 조선 통신사 477명 중 한 사람이었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소설 속 화자인 소년 최청유는 중인 집안 자식으로 역관 지망자였으며 이언진의 수행인 자격으로 일본을 방문한다.

귀국 후 이언진은 죽고, 최청유는 회상 형식으로 그의 죽음을 진술한다. 최청유는 자신이 일본에서 무엇을 보았으며, 귀국 후 이언진이 어째서 요절했는가를 글로 남겼다. 이 이야기를 남기고 최청유는 조선을 떠나 일본을 거쳐 아란타(네덜란드)로 향한다. 그는 다시는 조선 땅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이 소설은 두개의 살인사건과 아버지의 죽음에 가려진 추악한 비밀, 이언진의 요절을 바탕으로 흥미롭게 전개된다. 그러나 이 일련의 사건들은 독자를 붙들어놓기 위해 작가가 역사적 사실에서 차용했거나 꾸민 장치에 불과하다.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두가지 중요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언진은 어째서 죽었을까? 이언진을 아버지이자 형님이며 스승으로 따랐던 소년 최청유는 어째서 태어나고 자란 조선을 떠나 낯선 땅 아란타(네덜란드)로 떠나야만 했을까? 소년 최청유는 이 두가지 질문을 조선사회에 던지고 아란타로 떠났다. 그리고 작가는 최청유의 질문에 답하라고 오늘의 독자들에게 요구하고 있다.

이언진은 시문에 남다른 재능이 있었다. 그는 시문으로 인정받고 싶었다. 그러나 기껏해야 그는 중인으로 역관이었다. 그는 영의정도 좌의정도 될 수 없었다. 그는 어떻게든 조선 사회의 높은 신분적 벽을 부수고 싶었다. 그러나 불가능한 일이었다. 중인인 그에게 재능은 오히려 절망의 씨앗이었다. 이언진이 요절한 까닭이다.

제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갔던 귀한 물소뿔이 일본에는 널려 있다는 사실, 중인이든 양반이든 가리지 않고 시문이 뛰어나다면 누구 앞에서라도 머리를 조아리는 일본인들, 한양보다 열배는 큰 도시 일본 대판(오사카), 스승 이언진의 요절 등은 소년 최청유가 조선을 떠나 네덜란드로 향하는 이유다.

이 소설은 다만 18세기를 살았던 한 중인 남자 이언진의 재능과 그가 결코 넘지 못한 시대적 장벽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아버지이자 형님, 스승으로 따랐던 이언진의 죽음을 이유로 태어나고 자란 고향과 작별을 고하는 한 나이 어린 남자의 변명이 아니다. 이 두 주인공의 죽음과 작별은 조선시대와 전혀 다른 시대에 살고 있다고 믿는 우리들에게 비통한 마음으로 던지는 질문이다.

이 책을 접하는 독자가 만약 '나는 조선시대 선비들처럼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조선시대 사람들보다 일본의 현재와 과거를 더 정확하게, 많이 안다'고 단언하려면 예컨대 이런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지정학적으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조선과 일본의 근대적 개항시기는 어째서 20년 이상 차이가 있는가?(일본은 1854년에, 조선은 1876년에 개항했다.) ▷일본이 그처럼 빠른 속도로 근대화에 성공한 배경은 무엇일까?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쯤의 우리나라 아이들이 흔히 '일본놈' '쪽바리'라고 부르는 근거는 무엇인가? ▷일제강점기 한국 땅에 파견된 조선총독에는 어떤 인물들이 있었을까? ▷흔히 '선비 문화'와 '사무라이 문화'라고 지칭되는 양국의 문화적 공통점과 차이는 무엇일까? ▷우리나라와 일본 사이에 '유익한 거래' 혹은 '협력'은 어떤 것이 있을까? ▷만약 일본이 무척 싫다면 일본열도를 삽으로 파내 태평양에 흩어버릴 수 있을까?

작가는 후기에서 '이 소설이 조선과 조선시대 소년의 삶을 이해하는 동시에 우리 청소년들이 미래를 그려 가는 데 참고가 되기를 바란다'고 밝히고 있다. 목적성을 강하게 띤 소설이지만 독자의 흥미까지 꼼꼼하게 챙기고 있다. 부록으로 조선 통신사 이야기와 조선 통신사의 길, 계미사행(1763년 파견된 통신사 사절단) 등을 그림자료와 함께 담았다.

238쪽, 9천800원.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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