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살아가는 이야기)감자가 최고 맛있었다

40여년 전 우리 집은 단포리라는 시골에서 정미소를 운영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스무명도 훨씬 넘는 대가족으로 한데 북적거리며 살았다. 거기에다 정미소 일을 하는 일꾼들 3명과 보리나 나락을 빻으러 온 사람들로 온종일 집이 북적거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 많은 식구들의 하루 세번 식사 준비를 했던 큰 형수님의 고민이 얼마나 컸을까 싶다. 6월 중·하순경에 밭에 심은 감자를 캐면 열대여섯 가마니가 넘는다. 이를 소 구루마(달구지)로 몇 차례 싣고 집으로 가져온다. 보릿고개와 간식거리가 없던 시대라 감자는 보리밥과 함께 여름 내내 끼니와 간식으로 그 당시 최고의 주곡이었다.

가끔 해가 긴 여름날 저녁 끼니는 간식을 겸해 감자를 삶아 먹는다. 식구가 많다 보니 많은 감자를 삶아야 했다. 그래서 감자를 큰 함지박에 넣고 껍질을 벗긴다. 20명이 넘는 대가족이 먹는 감자를 몽당 숟가락으로 껍질을 벗기다 보면 손에 물집이 생기기 일쑤다. 그래서 나중에는 발로 지근지근 밟아 껍질을 벗긴다. 그리고는 마당에 걸어 둔 서말찌 솥(아주 큰 대형 가마솥을 부르는 말)에 넣고는 보릿단으로 불을 지펴 감자를 삶는다. 연기가 온 하늘로 오르는 모습은 지금 생각해 보면 장관이다.

감자가 다 익어갈 때쯤이면 아버지는 멍석을 깔고 그 옆 한쪽 모서리에 모깃불을 지핀다. 들판에서 베어온 풀 말린 것과 등겨(벼를 찧고 난 껍질)를 수북이 쌓아두고 연기를 마당 가득 담으면 여름밤은 은하수만큼이나 깊어 간다. 큰 형수님은 대여섯 바가지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감자를 담아 멍석 가운데로 가져온다. 그러면 온 식구들이 빙 둘러앉아 감자를 먹는다. 조카들은 곁들인 옥수수를 서로 가지려고 우르르 난리를 피우기도 한다.

이제는 그 많은 대가족들이 모두 뿔뿔이 흩어져 각자의 삶을 살고 있다. 형수님도 이제 여든을 훨씬 넘기고 있다. 되돌아보면 당시의 아련한 추억을 다시 찾을 수는 없지만 지금의 손자들에게 당시의 얘기를 하면 먼 옛날 전설의 고향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라고 웃기만 한다. 온 식구들이 멍석에 둘러앉아 바가지에 담아 먹던 감자 맛이 평생의 입맛으로 굳어져 버려서일까. 나는 지금도 감자를 좋아한다. 그래서 가끔 밥을 할 때 껍질 벗긴 감자 2, 3개를 밥솥에 얹어 달라고 하면 "뭔 감자가 그리 맛있냐"고 집사람이 티박을 준다. 어찌 그 옛날 보릿고개 당시에 입맛들인 감자의 참맛을 알기나 하랴.

올여름에는 흩어져 사는 피붙이 형제들과 조카들을 우리 집 마당에 불러 여름을 보내는 가족 만남의 날을 가져야겠다. 그리고 밭에서 캔 감자를 솥에 가득 넣어 삶아 먹으며 추억을 더듬고 가족의 소중함을 되새겨보는 기회도 가져야겠다. 그 생각을 하니 벌써 가슴 설렌다.

오현섭(군위군 소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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