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 바랜 종이에서 풍기는 눅눅한 냄새. 먼지 뽀얗게 앉은 헌책방에 들어설 때 느끼는 시각적·후각적 자극은 단순한 감각적 경험 이상이다. 헌책방에 들어서는 순간 우리는 과거로 시간여행을 떠나는 셈이다. 그곳에는 바로 과거의 지혜와 지식이 가득하다. 취재 중 만난 대구의 한 헌책방 주인은 "헌책은 문화재 같은 것"이라고 했다. 그에게 헌책은 '버려야 할 것'이 아니라 '아끼고 다듬고 보존해야 하는 보물'이다. 추억이라는 이유로 헌책방의 명맥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그곳에선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단골들 '추억은 방울방울'
책이 귀중했던 시절이 있었다. 불과 20~30년 전에는 책을 읽고 싶어도 책이 없거나 돈이 없어서 그러지 못한 사람이 많았다. 헌책방은 당시 이들에게 지식의 안식처였다. 누구의 손을 거쳤는진 알 수 없어도 손때 묻은 헌책은 이들의 지적 욕구를 한껏 풀어 주었다. 시인이자 출판사 대표인 박진형(54)씨도 그런 경우. 책값은 전혀 아깝지 않았고 무슨 책이든 닥치는 대로 읽었다. 박씨는 "산더미처럼 쌓인 먼지투성이 책더미에서 오랜 시집을 발견하면 정말 횡재한 기분이 들었다"고 했다. 그에게 헌책방은 '문화사랑방'이었다. 이규리 시인은 헌책방에서 나는 냄새에 대해 "얇은 종이와 종이 사이에는 책 읽는 사람의 영혼이 스며드는 게 아닐까. 그리고 그 냄새는 고요한 영혼의 냄새가 아닐까"라고 했다.
일반인들의 답은 이와 많이 달랐다. '헌책방에 대한 추억은 무엇이냐?'고 물으니 대부분 '책을 싸게 샀던 것'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경제적인 동기가 더 컸다는 말이다. 시청의 한 공무원은 여고 시절 "헌책방에서 참고서를 싸게 사고 남은 돈을 용돈으로 썼다"고 회상했다. 40, 50대 남성들은 교과서를 판 돈으로 막걸리나 맥주를 사 마셨다고 답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헌책방의 매력이 경제적인 것으로만 한정되지는 않는다. 어떤 이들은 여전히 헌책방의 애틋한 면에 주목한다. 이모씨는 "학창 시절 책을 찾아 경북대 후문 지하 헌책방에서 한나절 동안 머물기도 했다"고 했다. 그도 책을 뒤지다 전혀 뜻밖의 소설을 찾아 횡재하는 경험을 했다. 김모(30·여)씨는 "헌책방의 아날로그적인 감성이 좋다"고 했다. 그에게 헌책방은 책 이외 얘기도 많이 들을 수 있는 곳이었다.
◆헌책방 주인 '아! 옛날이여'
이용자들에게는 헌책방이 추억이지만 주인에게는 생업이다. 수십년 헌책방 장사에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이들에겐 이용객이 줄어드는 것만큼 심각한 상황도 없다. 현재 대구에는 헌책방 거리가 세군데 있다. 대구시청 주변, 대구역 네거리 지하도, 남문시장 건너편이다.
헌책방 주인들의 말을 종합해 보면 대구의 헌책방은 6·25 전쟁 직후 대구시청 근처에서 노점상 형태로 시작됐다. 헌책 장사가 잘되면서 헌책방이 대구역 굴다리 쪽으로 뻗어나갔다. 남문시장 쪽 월계서점도 1954년 문을 열었으니 비슷한 시기라 하겠다. 한창 헌책방이 많을 때엔 대구역 주변에 50여개, 남문시장에 30여개가 있었다. 한때 헌책이 날개 돋친 듯 팔리고, 사람들이 줄을 서서 헌책을 사던 때가 있었지만 모두 옛날 이야기다. 현재 대구에서 영업 중인 헌책방은 10여곳에 불과하다.
헌책방 주인들은 "요즘 사람들이 책을 안 읽는다"고 한목소리를 낸다. 인터넷 탓도 한다. "인터넷으로 책을 사고, 자료를 찾고, 사전 단어도 뒤적이기 때문에 헌책은 찬밥 신세"라고 했다. 대구시청 주변에서 헌책방을 2대째 운영 중인 이성자(52)씨는 "사람들이 책을 안 사보니 헌책도 안 생긴다"고 전했다.
◆온라인 영업으로 활로 찾기도
이용자도 할 말은 있다. 헌책방의 주먹구구식 운영에 관한 것이다. 헌책 분류가 전혀 안 돼 있어 이용이 불편하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한 누리꾼(아이디 biblio)은 한 인터넷 매체에 올린 글에서 '예전에 프랑스 파리에 갔을 때 찾은 헌책방의 규모와 체계적인 도서관리에 정말 놀랐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터넷 판매로 돌파구를 마련하는 헌책방도 있다. 경북대 후문 부근에서 서점을 경영하는 김창호씨는 30만여권의 헌책을 분류해 손수 사진을 찍어 홈페이지에 올린다. 매장을 찾아오는 손님은 거의 없지만 온라인 판매 주문 90%가 서울에서 이뤄질 정도로 인기란다. 남문시장의 한 서점 관계자도 "몇번의 시행착오 끝에 주문이 꾸준히 늘고 있다. 온라인 주문이 계속 늘면서 홈페이지 운영에 더 투자하고 있다"고 말했다. 다른 헌책방 주인들도 인터넷으로 사업을 해야 한다는 점은 공감하고 있었다.
새책 한권 값으로 서너권을 살 수 있고, 주인이 끓여주는 따뜻한 커피 한잔에 이야기도 나눌 수 있는 감성 어린 곳이 바로 헌책방이다. 네이버 블로거 서상일씨는 "자본이 쳐 놓은 욕망의 그물에서 벗어나야 헌것의 가치를 알아본다"고 썼다. 그런 시대는 오지 않는 것일까?
조문호기자 news119@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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