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우리피데스의 비극 '알케스티스'에는 다양한 인간군상이 등장한다. 이 비극에서 죽음과 관련해 주목해야 할 인물은 아드메토스다. 그는 법률과 예언, 가축의 신 아폴론에게 호의를 베푼 대가로 '당신이 죽어야 할 때 누군가 대신 죽으면 죽지 않도록 하겠다'는 약속을 얻게 된다. 죽음이 임박해지자 그는 죽기를 거부하고 대신 죽어줄 사람을 찾는다.
이 부분은 신이 인간의 생명까지 교란하고 있다고 비판받는 대목이다. 그러나 현대의 발달한 의료기술은 일부 장기고장으로 인한 '생명파멸'을 막을 수 있는 수준에 이르고 있다. 아폴론의 전지전능한 능력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발달한 의료기술이 '생명'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실이다.
돌아가서,
아드메토스는 아버지 페레스에게 대신 죽어줄 것을 청하지만 거절당하자 독설을 퍼붓는다.
"아버지는 비겁하기가 모든 이를 능가하십니다. 그토록 연로하고 이미 인생의 종점에 다다른 사람이 자식을 위해 죽을 용기도 없으시니 말입니다."
아버지가 대신 죽어죽기를 거부하지만 아드메토스는 포기하지 않는다. 그의 아내 알케스티스가 '대신 죽겠다'며 나선다. 아드메토스는 아내가 대신 죽겠다고 나서자 반색하며, "가련한 아내여, 힘 있는 신들께 동정해달라고(당신을 살려달라고) 빌어보오" 라고 말한다. (아내는 남편을 대신해 죽음의 신에게 끌려가게 됐지만 마침 헤라클레스가 근처를 지나가다 이 집에 들르게 되고, 남편 아드메토스의 대접에 감동한 나머지 죽음의 신과 악전고투를 벌인 끝에 그녀를 죽음에서 구해준다. 이 부분은 신들이 사람의 운명에 얼마나 간섭하는 가에 대한 이야기일 뿐, 남편 아드메토스가 아내를 살리기 위해 노력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아드메토스는 아내의 장례식을 치르는 동안에도 자기체면을 위해 손님을 극진하게 대접했을 뿐이다.)
아드메토스는 아내 알케스티스가 대신 죽음을 받아들인 덕분에 살아남는다. 그는 대신 죽기를 거부했던 아버지이게 또 다시 독설을 퍼붓는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제 자식이 있어도 자식 없이 늙어가세요. 내 집 지붕 아래로 들어오지도 마세요."
이에 아버지 페레스도 물러서지 않는다.
"오냐. 너는 많은 아내를 얻으려무나. 너 대신 더 많이 죽게."
이 다툼으로 아버지와 아들은 원수가 된다. 이 비극은 죽음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이며 이율배반적인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아드메토스는 살아남았지만 부모 잃고, 아내 잃고(신의 도움으로 아내도 후에 살아난다는 이야기지만), 웃음거리가 된다. 그는 생명을 연장하는 대가로'살아오면서 맺은 관계와 가치'를 잃어버린 인물이기도 하다. 이 부분은 '신의 간섭'에 관한 것으로 읽혔지만 의학기술이 발달할수록 '현실적인 이야기'로 와 닿는다.
육체적으로 비교적 건강하고 사회적으로 힘있는 아드메토스 대신 노쇠한 아버지나 연약한 아내가 죽는 것은 경우에 따라 '파레토 개선(자발적 거래는 당사자들의 복지를 늘린다. 거래 대상이 몸의 일부라도 그럴 수 있다. 아드메토스가 생명을 연장해 자식을 훌륭하게 키울 수도 있기 때문이다.)'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 아드메토스가 자식에게 '내 대신 죽어다오'라고 말했더라도 '파레토 개선'이 될 수 있을까. 아드메토스는 살기 위해 몸부림치지만 자식에게 대신 죽어달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부모에게 '장기'를 떼어줌으로써 효도를 행하는 자식의 이야기가 종종 언론에 '미담'으로 소개된다. 자식은 자기판단에 따라 부모에게 장기를 떼어줄 수 있다. 장기를 떼어줌으로써 자기 확신을 실현할 수 있고, 어떤 면에서 '사회적 이익'을 취할 수도 있다. 아직 사회적·경제적으로 무능한 자식이 장기 일부를 부모에게 떼 주고 부모의 생명을 연장하게 함으로써 '더 바람직한 사회인'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 행위를 '미담'으로 채색해도 좋을 지는 의문이다. 시사평론가 복거일의 말은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모든 유기체는 오랜 세월 자연도태를 통해 정교하게 다듬어진 유기적 조직이다. 그래서 몸에 군더더기가 거의 없다. 따라서 재생될 수 없는 조직이나 기관의 일부를 잘라내고서도 기증자의 몸에 나쁜 영향이 없기를 바랄 수는 없다. (중략) 종들의 진화는 생식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생명의 흐름은 부모에게서 자식에게로 흐른다. 그런 흐름은 아주 중요하며 모든 종들은 그 흐름을 되도록 안전하게 지키려고 무던히 애쓴다. 자식들이 부모를 위해 자신의 몸에 나쁜 영향을 미치는 일을 하는 것은, 부모가 자식을 위해 행하는 것과 달리 근본적으로 반생명적이다. 어른이 자신의 자식으로부터 장기를 받는 것은 그가 이룬 가장 중요한 업적인 자신의 유전자 전파를 허무는 짓이다."
삶과 죽음의 문제, 장기의 문제까지 '거래로 볼 수 있다'는 사실은 슬픈 일이기는 하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장기거래'는 흔하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종합병원의 화장실에는 '장기거래'를 알선하는 광고 스티커가 흔히 붙어 있었다. 근래에는 외국 원정치료를 통한 장기거래도 많다고 한다.
우리는 흔히 타인 간의 '장기거래'를 비판하지만, 부모에 대한 자식의 '장기기증'을 칭송하는 경향이 있는 듯 하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오히려 후자가 더 나쁜 결과를 가져오지 않을까?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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