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개는 치고 폭우는 쏟아져 앞을 가늠할 수 없는 칠흑 같은 밤이었습니다. 무섭고 떨렸지요. 도랑(소하천) 물이 범람하면서 저지대의 집들이 하나 둘 물에 잠기기 시작했어요. 빨리 주민들을 깨워야 한다는 생각에 마을방송을 했지만 모두가 잠든 시간이라 한 사람도 나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숨이 막힐 지경이었어요. 어쩔 수 없이 이집저집 뛰어다녔습니다. 번개불을 전등 삼아 이집저집 내달리다가 귀를 찢는 듯한 천둥 벼락이 무서워 나무 밑에 숨기도 했습니다. 생각만해도 끔찍합니다."
지난 24, 25일 227㎜의 폭우가 쏟아진 봉화 춘양면 서벽1리. 칠흑 같은 어둠 속, 폭우와 천둥 번개를 헤치며 5시간 동안의 사투 끝에 65가구 135명(남자 67·여자 68)의 이웃 주민들의 목숨을 구해낸 이 마을 이장 이현기(56)씨.
"당연히 할 일을 했다"며 취재를 극구 하지 않으려 해 애를 먹은 끝에 기자설득에 어렵게 말문을 연 이씨는 "한마디로 그날 밤은 악몽 그 자체였다"고 했다. 강원도 평창에서 마을에 벤치마킹을 온 손님들을 보내고 오후 11시30분쯤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하천의 물이 넘치는 것을 발견한 것이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다는 것이다.
"말도 말아요. 25일 오전 1시30분쯤 정전이 된 상태에서 자동차 라이트를 켜니까 물폭탄을 맞은 마을이 아수라장으로 변해 어디가 어딘지 구분하기조차 힘들었습니다." 그는 "집이 쓰러지고 트랙터와 자동차가 폭우에 밀려 떠내려가고 파도 같은 물줄기에 멀쩡한 가게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모습은 다시 생각조차 하기 싫다"고 고개를 내저었다.
"벼락을 맞을까 걱정이 돼 주머니 속에 있던 동전까지 모두 버리고 나무 밑으로 잠시 피하기도 했다"는 그는 "산 위로 올라가니 대피한 주민들이 잠옷 차림으로 비를 맞으며 덜덜 떨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오전 5시쯤 날이 밝자 마을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마치 낯선 전쟁터에 온 기분이었다는 것이다.
25일 0시부터 다음 날 오전 5시까지 그렇게 동분서주하며 주민들을 피신시킨 뒤 '이제는 됐다' 싶어 돌아서려는 데 "살려주세요"라는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김연화(70)할머니와 딸 임영희(47·지체장애자)씨 모녀가 턱까지 물이 찬 창문가에 둥둥 떠다니고 있는 것을 가까스로 구해내기도 했다.
"약초시험장에 다니기 위해 마을에서 500~600m 떨어진 빈 집에 머물던 이상순(64)씨와 딸 박영순(20)씨가 생각나 찾아갔을 때는 이미 주택이 매몰된 상태였다"는 이씨는 "날이 밝으면 구미에 돈 벌러 간 아빠를 만나러 간다고 그렇게 좋아했는데…."라며 폭우에 목숨을 잃은 두 사람 생각에 눈시울을 붉혔다.
이장의 살신성인 덕분에 이 마을은 폭우에 쑥대밭이 되었지만 인명피해는 크지 않았다. 지난 2002년부터 6년째 마을 이장으로 일하고 있는 이씨는 현재 봉화군 이장 연합회 부회장으로 서벽지구농촌개발사업 위원장을 맡고 있기도 하다. 이씨는 이제 마을을 어떻게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할 지 그날밤 폭우속처럼 그저 앞날이 깜깜할 따름이라고 했다.
봉화·마경대기자 kdma@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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