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계산동에서] 신춘문예를 앞둔 文靑들에게

다시 신춘문예의 계절이다. 이제 신문사들마다 社告(사고)를 내 작품모집을 알릴 것이고, 문학도들은 잠 못 이루는 밤을 맞이할 것이다.

신춘문예 무용론이 제기된 것이 오래 전이고, 신춘문예를 둘러싼 일부 추문도 있었다. 텔레비전과 인터넷, 휴대전화의 발달로 글쓰기의 세월은 지나갔다는 말도 있다. 일년에 책 한 권 읽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고 한다. 그럼에도 신춘문예 열기는 식지 않았다. 오히려 해마다 응모자가 늘어나고 있다.

이맘때면 문학청년들은 안 보던 신문도 보고, 신문사 홈페이지를 들락거리며 사고를 살핀다. 그리고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열병을 앓는다. 썼던 원고를 몇 번이나 지우고 다시 쓴다. 때로는 회심의 미소를 짓고 때로는 절망에 휩싸이기도 한다. 이른 아침 그렇게 쓴 원고를 들고 우체국으로 향하는 얼굴에는 비장미마저 느껴진다. 그는 또 우체국 담당자의 손놀림을 유심히 살핀다. 혹시 실수로 배달사고가 발생하는 것은 아닐까, 우체국 직원이 내 원고를 훔쳐 가지는 않을까…. 노파심에 먼길을 달려가 신문사에 직접 원고를 제출하는 응모자들도 있다. 그러나 거기에도 심드렁하고 기계적인 눈빛과 손놀림이 기다리고 있다. 제 할 일에 바쁜 기자가 '거기 원고 놓고 가시면 돼요'라고 말하면 왠지 찜찜해진다.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놓아둔 원고가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은 무겁기만 하다. 담당기자가 따뜻한 말 한마디라도 건네면 터무니없는 희망에 휩싸이기도 한다.

신춘문예에 일곱 번 응모했다는 한 지망자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는 원고를 제출한 날부터 매일 이마를 세 번씩 문틀에 찧었어요. 그래서 그 문틀을 통과할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어떤 때는 세 번 중 한 번을 좀 살짝 찧은 게 아닌가 싶어서 네 번을 찧기도 했어요. 그리고 짝수는 왠지 운이 따라주지 않을 것 같아서 다시 처음부터 세 번을 찧기도 했어요."

하루에 세 번씩 문틀에 이마를 찧는다고 신춘문예에 당선될 리 없다. 그러나 그 이마 찧기야말로 그가 얼마나 당선을 고대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다. 이마 찧을 시간에 글이나 더 잘 쓰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는 글도 정성스럽게 잘 썼을 것이다. 글을 대충 쓴 사람이 이마를 찧을 리 없으니 말이다.

옛 어머니들은 '우리 아이 잘되라'고 장독대에 물 떠놓고 빌고 또 빌었다. 장독대에 물 떠놓고 비는 행위가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지만 그런 정성으로 자식을 키웠기에 아이들은 잘 자랐다. 이마 찧기도 마찬가지다. 그런 정성으로 쓴 글이라면 좋은 글일 것이고, 그러니 당선의 영광도 있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많은 문학도들은 떨리는 가슴으로 밤을 하얗게 지새운다. 강요하는 사람도 없는데 스스로 시험대에 오르고, 누구도 격려하지 않는 가운데 글을 쓴다. 그리고 누구도 위로하지 않는 가운데 절망한다. 신춘문예 당선이 '출세'의 관문도 아니다. 어째서, 왜 그래야 하는지 설명해주는 사람이 없고 자신도 모른다. 문학도들에게 신춘문예는 '첫사랑'과 같은 것이다.

신춘문예 응모자들에게 글 쓰기와 투고, 기다림은 분명히 고통이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부터 올해 12월 31일까지 그들에게 신춘문예 응모는 세상의 전부일 것이다. 순간일지라도 '세상의 전부'를 갖고 있다는 사실, 그 전부를 향해 뚜벅뚜벅 걷고 있다는 사실은 축복이다. 이 계절 잠 못 이루는 모든 문학인들에게 행운이 있기를 기원한다.

조두진 문화부 차장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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