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포항 철강中企 "망하지 않으려고 빈기계 돌립니다"

"조업중단한 회사에 돈 빌려 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기계 돌리는 시늉이라도 해야 운전자금 대출 받을 것 아닙니까?"

불황이 깊어지면서 일부 중소기업을 중심으로 실제 제품 생산을 하지 않으면서 설비 돌리는 시늉만 하는 사실상의 '위장조업'이 등장했다.

금융권이 자금난을 겪거나 매출실적이 부진한 중소기업 주변에서 '감산'이나 '조업중단' 등 부정적인 말만 나와도 즉시 자금지원 중단조치를 취하자 이런 상황을 우려한 일부 업체들이 빈 기계·장비를 돌리거나 재고 쌓아 놓는 장소를 이곳저곳으로 바꿔가며 물량 수송이 많은 것처럼 보이게 하는 '순전히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조업'으로 맞대응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억지조업은 국내 산업계에서 사상 처음 있는 일로 알려지고 있다. 때문에 업체들은 비싼 전기료·기름값 들여가며 과연 이런 짓까지 해야 하느냐며 볼멘소리지만 드러내 놓고 하소연할 처지도 못돼 공공연한 비밀이 되고 있다.

고철을 녹여 철강제품을 만드는 포항의 한 중소기업은 사내 야적장에 쌓아둔 오래된 재고를 다시 녹여 새 제품으로 만드는 '새로 만들기'를 최근 며칠째 계속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렇게 하면 매출실적은 없어도 원자재 비용과 재고부담을 덜 수 있고, 최소한 '저 회사 설비 세웠다더라'는 말은 나오지 않게 하는 효과가 있어 당분간 이런 조업방법을 유지할 가능성이 높다고 한 관계자는 전했다.

또 다른 업체는 지게차와 크레인을 동원해 회사 마당에 쌓아둔 제품을 '오늘은 이쪽, 내일은 저쪽'으로 위치를 바꿔가며 옮기기만 하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대형 중장비가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바쁘게 움직이는 탓에 겉보기에는 활기차게 움직인다는 전시효과를 노린 것이다.

A업체 대표는 "은행 사람들이 매일같이 회사 주변에서 몰래 동태를 살피거나 전화로 '별일 없냐'고 묻는 통에 실속 없는 가동이라도 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B업체 사장도 "은행들이 유독 약한 중소기업에만 칼을 들이대는 바람에 쓸데없는 비용을 추가로 날리고 있다"며 "일시적 감산이나 조업중단이 비용절감책인데 이마저 할 수 없으니 경영난이 가중되는 것"이라고 하소연했다.

이에 대해 포항의 한 은행 지점장은 "대출심사를 할 때 첫번째 고려사항이 '현재 가동실태'이기에 어쩔 수 없다. 위장조업이라도 설비를 돌려야 대출조건이 성립한다"며 "억지가동에 따른 낭비요인이 있는 줄 알지만 우리(은행)로서도 다른 묘안을 찾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망하지 않기 위해 빈 기계를 돌리고 있는 중소기업 종사자들은 정부의 금융지원 강화 방침이 현장에서 어떻게 왜곡되고 있는지를 먼저 살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포항·박정출기자 jcpark@msnet.co.kr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