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경제야 놀자] '기펜財' 라면

'심각한 경기 불황'이라는 지표 수치가 쏟아지고 있는 가운데, 대표적 불경기 상품인 라면의 매출이 최근 두 자릿수 성장률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문득 우리나라 사람만큼 인스턴트식품인 라면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갖고 있는 국민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면 '라면 맛있게 끓이는 법'만 수천 가지가 넘고, 한 TV 프로그램에서는 라면 끓이는 방법을 두고 심각한 부부싸움이 일어나기도 한다. 라면 끓이는 방법이 개인의 철학으로 승화되는 시점이다.

한국인이라면 응당 집에 적어도 5개 이상의 라면을 쌓아놓는 것이 당연할 만큼 우리와 친숙한 음식인 라면은 경제학적 관점에서도 특이한 현상을 설명해 주는 좋은 자료가 된다. 라면은 수요법칙을 역행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가격이 상승하면 수요량이 줄어들고, 가격이 하락하면 수요량이 늘어나야 하는 것이 수요법칙인데, 라면은 이 법칙과 반대로 움직이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1990년대 말 IMF위기 때와 지금과 같은 불황기에 잘 관찰할 수 있다. 불황기에 전반적으로 물가가 오르는 스태그플레이션과 최근에 있었던 애그플레이션의 영향으로 밀가루 가격이 오르면서 덩달아 라면 가격도 25% 정도 올랐는데, 라면 수요량은 오히려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관찰되는 재화인 라면을 기펜재(Giffen財)라고 한다.

영국의 경제학자 기펜은 아일랜드 사람들의 소비행위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이상한 현상을 발견했다. 아일랜드 사람들의 주식은 감자였는데, 감자 가격이 오를수록 감자 수요량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늘어난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이것을 기펜의 역설(Giffen's paradox)이라고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1990년대 말 외환위기는 국민들의 명목소득을 감소시켰으며 수입 원재료를 사용하는 많은 상품들의 가격 인상을 가져왔다. 당시 라면은 값이 오른 대표적인 상품이었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수요는 크게 감소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라면은 오히려 판매량이 크게 증가하였다. 기펜재를 현실에서 찾아보기는 매우 어렵지만, 바로 이 기간 동안에 라면은 기펜재의 조건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수시로 변하는 시장 환경 속에서 어떤 재화가 지속적으로 기펜재의 특성을 보이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적어도 IMF사태 직후에 나타난 라면시장은 기펜재라는 매우 드문 현상을 보여주었다. 현재의 상황도 외환위기 직후의 상황과 비슷하다. 라면은 'MB 관리품목'이었지만 애그플레이션의 압력 때문에 가격이 올랐고, 라면의 수요량은 증가하는 현상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가격이 내려가면 소비가 줄어드는 재화도 기펜재에 속한다. 1990년대 미국에서는 증권시장 활황과 부동산값 급등으로 재산을 축적한 사람들 사이에서 싼 것은 기피하고 비싼 것을 선호하는 경향이 뚜렷했다. '기펜족'이라는 신조어까지 생겼을 정도였다. '비싸기 때문에 사는' 기펜족의 영향으로 최고급 양주인 조니워커 블루와 노키아 계열사인 버투의 2만달러에 육박하는 핸드폰이 잘 팔렸던 것이다.

기펜재를 기픈재로 표기한 책들도 있다. 이는 Giffen이 영국 사람이기 때문에 독일식으로 발음한 '기펜'을 영국식 발음인 '기픈'으로 표기를 고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제시한 '기픈'은 이명박 정부의 '오린지' 소동과 같은 맥락에서 살짝 안쓰럽다.

박경원(대구과학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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