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상 호러영화는 끔찍한 살육의 현장을 그린다.
첨예한 살의와 무작위적인 적의가 칼날위에 춤을 춘다. 공포 외에는 그 어디에도 인간의 심상이 파고들 여지가 없다. 사랑도 이별도, 기다림의 절실함과 아련함도 없다.
그런데 초겨울 시리게 아픈 뱀파이어영화가 개봉했다.
스웨덴에서 온 '렛미인'이란 영화다. 이 영화는 스웨덴 토마스 알프레드슨이 2004년 유럽에서 출간된 욘 린퀴비스트의 소설 'Let the right one in'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1982년 스웨덴의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12살 '왕따' 소년과 뱀파이어 소녀와의 사랑을 다룬 작품이다.
학교 친구들의 괴롭힘에 시달리는 12세 소년 오스칼(카레 헤레브란트). 늘 칼을 들고다니지만, 애꿎은 나무에만 화풀이를 할 뿐이다. 눈 내리던 어느 날 밤. 창백한 얼굴을 한 수수께끼 소녀 이엘리(리나 레안데르손)를 만난다. 차가운 북유럽의 밤이지만, 그녀는 반소매 차림. 처음부터 이상한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세상 누구도 믿을 수 없었던 둘은 곧 친구가 된다. 그리고 설레는 감정도 싹튼다.
그런데 마을에 이상한 일들이 생긴다. 피가 빠진 시체들이 계속 발견된다. 몇몇은 뱀파이어의 공격도 받는다. 오스칼은 그녀가 뱀파이어라는 사실을 눈치챈다. 그러나 그녀에 대한 오스칼의 사랑은 깊어 간다.
'렛미인'은 여느 뱀파이어 영화와는 다르다. 섹슈얼하지도 않고, 도심을 고공비행하는 뱀파이어의 가공할 초능력도, 블랙 슈트를 차려입은 신세대 뱀파이어도 없다. 남루하고, 처절하게 외로운 비운의 어린 뱀파이어가 하얀 얼굴에 금방이라도 눈망울이 쏟아질 듯 애처로운 모습으로 나온다.
제목은 '들어가도 돼?'라는 뜻이다. 이엘리는 늘 창문에 붙어서 '들어가도 되느냐?'고 허락을 구한다. 뱀파이어가 인간의 공간에 들어가려면 초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은 원작자의 독특한 설정이다. 원작에는 뱀파이어가 인간의 허락 없이 그들의 공간으로 들어가면 온몸의 피가 솟구치는 끔찍한 일을 당한다고 적고 있다.
이는 인간과 뱀파이어의 공간을 구분하는 최소한의 경계다. 그러나 타인의 가슴, 타인의 세계에 들어가려는 애절한 바람은 오스카도 마찬가지다. 끊임없이 희생과 관심, 사랑이 필요한 같은 유기체이면서, 다른 생명을 가진 둘의 절절함이 묻어나는 설정이다.
늘 하얀 눈이 내리고, 얼음으로 덮인 북유럽의 작은 마을이란 배경이 낯선 뱀파이어의 느낌을 더해준다. 어둠이 내리면 사람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을씨년스런 거리, 숲, 가난한 사람의 저층 아파트는 살아가기 위해 피를 찾아야 하는 이엘리의 절박함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
하얀 눈 위에 뿌려지는 붉은 피, 창백한 이엘리의 입가에 묻는 피는 슬프게도 아름다운 이 영화의 이미지이다.
두 아역배우의 연기 또한 빛이 난다. 제작진은 캐릭터에 딱 맞는 이미지를 가진 아역을 캐스팅하기 위해 1년이 넘게 공개 오디션을 치렀다고 한다. 특히 이엘리역의 리나 레안데르손은 금방이라도 북유럽 신화에서 뛰쳐나온 듯 신비로운 느낌을 자아낸다.
화려한 편집도 없고, 그 흔한 디지털 사운드 효과도 없다. 멀리서 개가 짖는 소리가 나직한 가운데, 뚝뚝 떨어지는 피 소리는 전율할 정도로 사실적이다.
'렛미인'은 스웨덴이란 낯선 공간에서 벌어지는 낯선 장르의 영화다. 그러나 한 꺼풀 벗기고 들어가면 가슴 시린 사랑을 느낄 수 있다. 호러의 형식을 빌린 소년과 소녀의 러브스토리, '가장 아름다운 호러' '내 생애 가장 서정적인 호러'라는 해외평단의 평가가 적절해 보이는 영화다. 대구는 1개 스크린(CGV대구점)에서만 개봉했고, 15일부터 예술전용관 동성아트홀에서 상영될 예정이다. 114분, 15세 관람가.
김중기기자 filmtong@msnet.co.kr
댓글 많은 뉴스
문재인 "정치탄압"…뇌물죄 수사검사 공수처에 고발
이준석, 전장연 성당 시위에 "사회적 약자 프레임 악용한 집단 이기주의"
[전문] 한덕수, 대선 출마 "임기 3년으로 단축…개헌 완료 후 퇴임"
대법, 이재명 '선거법 위반' 파기환송…"골프발언, 허위사실공표"
민주당 "李 유죄 판단 대법관 10명 탄핵하자"…국힘 "이성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