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뇌물로 변신하는 '은밀한 그림들'…왜 자꾸 불거지나

그림이 말썽이다. 최욱경 화백의 '학동마을'을 둘러싼 '그림 로비' 의혹이 국세청장의 사표까지 불러왔다. 2007년 신정아 학력 위조 사건과 2008년 삼성 비자금 특검 당시 논란이 된 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 등 사회적 물의를 빚는 큰 사건마다 그림이 결부돼 있는 셈이다. 예술의 영역에 머물러야할 그림이 뇌물이나 비자금 조성 등 어두운 용도로 사용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왜 뇌물로 쓰일까

그림이 뇌물이나 로비, 비자금 조성 용도로 변질되는 건 미술 시장이 급속도로 커지고 작품 값이 급등하면서 미술품의 경제적 가치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특히 그림은 고상함과 품위로 뇌물을 포장할 수 있고 현찰이나 보석·부동산 등에 비해 주고 받는 쪽 모두 부담이 적으면서도 효과는 크다. 환금성이 높고 재산가치가 큰데다 한쪽에서 발설하지 않는 이상 드러나지 않는다. 특히 그림 거래에는 양도세나 취·등록세 등 세금이 붙지 않기 때문에 유통 경로도 베일에 가려져 있다. 시장에 나오기 전까지는 그림의 가치를 매기기 힘들기 때문에 선물을 받은 사람이 "그렇게 비싼 작품인 줄 몰랐다"며 발뺌할 여지도 크다. 미술계 관계자는 "미술작품은 개인간 거래가 신고되는 것도 아니고 고액의 작품의 경우 소장자나 구입자를 밝히지 않는 것이 관례"라며 "신분을 노출하지 않고 구입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누가 사갔는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거래가 은밀한만큼 뇌물로 처벌을 받은 경우도 극히 드물다. 1998년 서울대 치과대학 교수 임용 비리 당시 2천만원대 그림 2점이 건네졌다는 혐의가 제기됐고, 지난 1999년 신동아 그룹의 '옷 로비' 사건 때도 60억원 대 그림 로비 의혹이 있었지만 결국 흐지부지됐다.

뇌물로 받은 그림은 위작이나 수준 이하의 작품들이 오가는 경우도 많다. 그림의 진위는 미술시장에 나온 뒤에서야 밝혀지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실제 김대중 전 대통령,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 등은 미술을 각별히 애호해 그림 선물이 답지했다. 김 전 대통령은 선물 받은 정약용 서예병풍을 집안에 걸었다가 위작으로 밝혀져 결국 치우기도 했다.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경우, 사형당한 뒤 재산을 환수하는 과정에서 유명작가의 그림과 글씨, 골동품 수백점이 나왔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 가짜였고, 청와대 경호실의 한 경찰관이 인사청탁용으로 건넸다는 천경자의 '미인도'가 거의 유일한 진품이었다. 그마저도 천경자 본인이 "내 작품이 아니다"라고 부인하는 바람에 진위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상속과 증여 수단으로 쓰이기도

고가의 알짜 그림들은 뇌물보다는 부유층 사이에서 상속이나 증여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특히 최근 몇 년간 재산 가치로서 미술품이 각광을 받으면서 재산 증식의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 미술 경매시장이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을 누렸던 2007년과 지난해의 경우 부유층 사이에서 자녀들에게 수천만원대 고가 미술품을 사주는 행태가 유행하기도 했다는 것.

한 화랑 관계자는 "최근 들어 고가의 미술품을 보유하고 있다가 자녀들의 결혼 선물로 건네주는 경우가 많다"며 "미술품을 장기 보유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주식 거래에서 '단타'를 치듯이 사고 팔면서 시세 차익을 노리고, 700억원 규모의 아트 펀드까지 가세하는 등 투기 목적의 미술품 투자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실제 한국 미술시장 연간 거래액은 2006년 725억원에서 2007년 2천606억원, 지난해 1천747억원 수준으로 큰 폭의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미술품이 재산으로 인식되는 것에 대해 '미술에 대한 문화적 인지도가 높아졌다는 반증'이라는 해석도 있다. 과거 미술품이 위작이나 도굴의 대상이었다면 이제 미술품은 상류층을 중심으로 문화적·경제적 가치가 인정받고 있다는 것이다. 김태곤 대백갤러리 큐레이터는 "미술품이 뇌물이나 비자금의 수단으로 악용되면서 일반인들이 갖는 이미지는 실추된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아트펀드 등이 등장한다는 것 자체가 전체적 문화 수준이 높아진다는 의미도 된다"고 말했다.

◆양도소득세 부과 해법될까

양도세가 부과되면 미술품과 관련된 로비도 줄어들 것으로 기대된다. 지난해 정부는 오는 2011년부터 미술품에도 양도소득세를 매기기로 했다. 한 점에 6천만원이 넘는 미술품이나 골동품을 파는 사람은 양도 차익의 20%를 세금으로 내야 하는 것. 작고한 국내 작가의 작품만 과세 대상이며 보유 기간이 10년 이상인 작품은 양도차익의 90%를, 10년 미만인 작품은 80%를 공제해 준다. 그림 값이 6천만원에 못 미치는 경우엔 세금을 물지 않는다. 조상에게 미술품을 물려받았거나, 공짜로 선물 받은 사람도 팔 때 가격이 6천만원이 넘으면 양도세를 내야 한다.

미술작품 거래가 활발한 유럽의 경우, 고가 미술작품에 대해 '소장이력'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명화 한 점에는 진위감정에서부터 거쳐간 소장가의 정보가 모두 기록된다. 프랑스는 '위촉감정사제도'로 그림이 뇌물로 변질되는 것을 막고 있다. 신원이 보장된 감정사가 받은 작품의 가치를 매기는 것. 이 경우 가격이 공개되기 때문에 고가의 그림을 선물받은 공직자는 신고여부를 결정할 수 있게 된다. '비싼 줄 몰랐다'는 변명이 통하지 않는 셈이다. 대구 미술계 관계자는 "양도세를 매기게 되면 미술품을 재산 증식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일반인들의 거래는 상당부분 위축될 것"이라면서도 "영수증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감정가가 수시로 달라질 수 있는데 현실적으로 양도세를 매기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장성현기자 jacksoul@msnet.co.kr

'학동마을'은 여류 화가인 고(故) 최욱경(1940~1985) 화백이 숨지기 일년 전에 그린 작품으로 추상표현주의 계열에 속한다. 비교적 소품인 8호(38×45.5㎝)짜리 작품으로 마을에서 느낀 분위기를 강렬한 붉은 색과 새로운 구도로 표현했다.

최욱경 화백은 화려하고 격정적인 색채의 작품들로 한국 추상표현주의를 처음 도입한 작가로 꼽힌다. 1940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김기창, 김흥수 등 유명 화가를 사사했다. 1963년 서울대 회화과를 졸업한 뒤 미국 크랜브룩 아카데미오브아트에서 공부했다. 1965년부터 1984년까지 한국, 미국, 대만, 노르웨이, 캐나다 등지에서 16차례 개인전을 열었다. 영남대 미술대 교수, 덕성여대 미대 부교수 등을 지내기도 했다.

추상미술이 낯설었던 한국 화단에서 풍부한 색감과 환상적인 구도로 작품을 표현했다. 1985년 음주상태에서 다량의 수면제를 복용해 45세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생전 500여점이 넘는 작품을 남겼지만 작품 수에 비해 상당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특별전을 비롯해 국내에서 손꼽히는 화랑에서 11주기, 20주기 회고전이 열릴 정도로 사후에 주목을 받았다.

1975년 작품 '풀밭 위의 점심식사'는 2007년 8천만원에 팔렸으며, '무제'는 2005년 5천800만원에 거래됐다. 작품 '생의 환희'는 2006년 9천500만~1억2천만원선에 경매에 부쳐졌지만 유찰되기도 했다. 논란이 된 '학동마을'의 경우 5천만원 이상이라는 분석도 있었지만 미술계에서는 대체로 2천만원선에 거래될 것으로 보고 있다. 김태곤 대백갤러리 큐레이터는 "최욱경 화백의 작품은 미술사적으로 가치가 있는 작품이지만 일반인들이 이해하기는 어려운 면이 있다"며 "만약 '학동마을'의 가치를 알았다면 전군표 전 국세청장의 부인이 화랑에 내놓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장성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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