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빈(32) 감독은 참 느닷없이 나타났다. 대구 출신의 이 젊은 감독은 2007년 단편 '프랑스 중위의 여자'로 문화적 감수성과 영화적 섬세함을 결합하는 재능을 보여주더니, 첫 장편 '장례식의 여자'로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뉴 커런츠 부문에서 '특별언급상'과 '아시아 영화진흥기구상'까지 2개 부문을 수상하며 주목을 받았다. 이 영화는 이달 15일까지 열린 제59회 베를린국제영화제 비경쟁 부문 '포럼' 섹션에도 초청됐다. 지난 4일 오후 대구 달서구 한 커피전문점에서 백 감독을 만났다. 베를린영화제 참석을 위해 출국하기 전이었다. 앳된 얼굴에 두터운 목도리, 배낭을 메고 나타난 그의 외모는 전혀 '감독'스럽지 않았다. 차분하고 수줍음 많은 그의 머릿속에서 상상과 현실이 뒤섞인 다층적인 이야기들이 흘러나오는 것이 신기하단 생각까지 들었다. 베를린영화제 초청작인 '장례식의 멤버'는 다음달부터 CGV 예술영화 전문상영관 무비꼴라주에서 상영될 예정이다. 아쉽게도 대구에서는 보기 힘들 듯싶다.
◆일상적 사건들을 이야기로 부풀리는 게 재밌어
그에게는 '문학적 감수성과 영화적 섬세함을 결합하는 재능'이 탁월하다는 평가가 따라다닌다. 특히 존 파울즈의 동명 소설을 소재로 삼은 단편 '프랑스 중위의 여자'(2007)는 그의 재능이 본격적으로 주목받는 계기가 됐다. 그는 이 영화를 두고 "어머니에 관한 영화이고, 자전적인 경험이 많이 담겨있다"고 했다. 영화 속에서 병든 어머니를 둔 17세의 책벌레 광호는 어머니가 작가이며 '프랑스 중위의 여자'를 쓴 존 파울즈의 연인이고, 자신이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라고 상상한다. 대학 시절 그의 어머니는 폐암 말기 선고를 받았고 6개월밖에 더 살지 못했다. "아프신 어머니의 수발을 들면서 책 읽는 시간을 뺏긴다고 생각한 거예요. 어머니가 처지에 대한 비관과 인생의 한을 많이 이야기하셨는데 그런 나약한 말씀을 하지 않는 강한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유아적인 상상도 많이 했고요. 지금은 후회가 많아요. 아마 끝까지 상처를 갖고 살겠죠."
책을 베껴 쓰는 것도 자신의 경험에서 나왔다. "책을 베껴 쓰는 건 고교 때 굉장히 많이 했던 일이에요. '어떻게 이렇게 재미있게 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재미있는 문장을 일기장에 베껴 썼어요. 특히 '프랑스 중위의 여자'와 '호밀밭의 파수꾼'은 책을 통째로 베껴 썼죠. '호밀밭의 파수꾼'은 개인적으로 굉장히 좋아하는 책이에요." 어머니가 돌아가시던 날, 그는 졸업시험 준비로 새벽까지 맥아더 장군의 마지막 연설문을 외우고 있었다. "그 후로 맥아더와 어머니 사이에는 고리가 생겼어요. 한때 맥아더 장군을 제목으로 어머니에 관한 소설을 써볼까 하는 생각도 했었죠. 그런 단상들로부터 계속 픽션을 만들어내고 그 의미와 코드를 가져오는 데 흥미가 있어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재미는 일상으로도 이어진다. 일상 속 작은 사건들을 상상을 통해 이야기로 발전시키는 습관 탓이다. "길을 걷다가도 걸음걸이가 남다른 사람을 보면 '저렇게 걷는 이유가 있을 거야'라며 과거와 미래까지 상상을 해요. 일종의 '뻥'이죠. 그 '뻥'의 논리와 과정이 너무 재미있어요. 어찌 보면 미친 상상일 수도 있겠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영화는 무엇인지' 물었다. "어머니가 영화광이셨는데, 해리슨 포드와 리처드 기어를 좋아하셨어요. 특히 '사관과 신사'라는 영화를 함께 보면서 마지막 장면에서 리처드 기어가 여주인공을 안고 나가는 장면이 나오는데 어머니가 '저걸 봐라. 남자는 저래야 하는 거다'라고 말씀하신 게 기억에 남아요. 어머니를 생각하면 항상 그 기억이 나요."
◆웰메이드 상업영화 만들고파
-베를린영화제 초청이 앞으로의 영화감독 생활에 도움이 될까요?
"개인적으로 '장례식의 멤버'는 크게 만족한 작품이 아닙니다. 첫 장편영화이다 보니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고, 그런 점들이 작품에 묻어나니까 볼 때마다 가슴이 아리고 아쉬워요. 해외영화제 초청은 좋은 일이죠. 하지만 해외 유명영화제에 자꾸 초청이 되면 '자신의 얘기를 주로 하는 예술 지향적인 감독'이라는 인식이 생겨요. 그러면 영화를 만들수 있는 기회가 제한될 수 있거든요. 대중영화의 최고봉은 '아메리칸 뷰티'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잘 만든 상업영화를 만들고 싶어요. 전 스토리텔링에 관심이 많은데, 흥미로운 소재들을 좀 더 대중적으로 소통하도록 만드는 방식이 무엇인지 찾는 중입니다."
-스토리텔링을 좋아하는 것은 문학에 대한 관심 때문인가요?
"어릴 때부터 꿈이 소설가였고 궁극적으로는 소설을 쓰고 싶어요. 대학 다닐 때도 문학 수업을 많이 들었고 영화 시나리오도 소설의 스토리텔링의 일환으로 시작을 했어요. 아직 소설을 쓰기엔 경험이나 통찰력이 미비한 점이 많다고 생각해요. 선호하는 문학과 영화의 종류도 달라요. 문학은 '제인에어' '폭풍의 언덕' 혹은 '주드'나 '테스'처럼 고전적인 인물이 죄 때문에 몰락하는 내용을 좋아해요. 그런데 영화는 할리우드 클래식 코미디 영화를 선호하죠. '아파트 열쇠를 빌려드립니다' '선셋대로' 등을 만든 빌리 와일더 감독은 언제 봐도 근사해요. '어느날 밤에 생긴 일'처럼 다다닥 대사가 나오는 코미디 영화들도 좋아하고요."
-10대 시절에는 어떤 학생이었어요?
"정말 안 보이는 학생이었어요. 조금이라도 튀면 큰일 난다고, 미래에 상처가 난다고 생각했거든요. 가령 교실 뒤편에서 담배 냄새를 풍기며 들어오는 친구들하고는 일년 동안 말도 안 했던 적도 있었어요. 지금은 왜 그렇게 10대 시절을 재미없게 보냈을까에 대해 후회해요. 겁이 많아서 학교와 집만 오가며 안전한 소설 속의 세계에서만 살았던 것 같아요. 영화를 만들면서도 저와 다른 생활과 성장 배경을 갖고 있는 배우들과는 공감하기 힘들었죠. 그 시절에 대한 보상 심리 때문에 좀 더 과장되고 극단적인 10대의 캐릭터를 만들고 있다는 생각도 들어요."
-소설가를 꿈꾸다가 왜 영화를 만들겠다고 결심했죠?
"대학 때 영화동아리에서 열심히 활동을 했는데, 졸업을 앞두고 한국영화아카데미 지원 공고가 났어요. 영화를 제대로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동아리 친구들과 제출용 영화로 '당일치기 여행자들'이라는 영화를 만들었어요. 교환학생으로 온 미국인 여학생을 주인공으로 전부 영어로만 된 코미디 영화였죠. 면접관들이 '어떻게 이렇게 영화를 막 만들어서 지원했냐. 영화과 출신이었으면 안 뽑았다'고 얘기하더군요."
◆서사가 중심이 된 호러영화 만들고 싶어
-'장례식의 멤버'를 통해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뭡니까?
"결핍을 가진 사람들이 가족을 이루고 사는 이유가 무엇인가. 40대 가장이 자신의 성적 취향을 숨기고 청년을 만나기도 하고, 어릴 적 단짝 친구가 죽고 난 이후에 장례지도사가 돼서 시체를 닦는 딸도 등장합니다. 이들은 각각 다른 이유로 죽은 아이와 다른 관계를 맺고 있다가 장례식장에서 한자리에 모입니다. 과연 어떤 감정이 이들을 가족으로 엮어내는 것일까 하는 거죠.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한국 관객과 외국관객의 반응이 달랐어요. 외국 관객들은 영화의 가족 관계를 보며 가부장적이고 유교적 성향의 한국을 상상하고, 한국 관객들은 기성세대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 찬 10대 소년·소녀들에 관한 이야기라거나 한국 사회의 가족에 희망이 없다는 내용을 담았다고 봅니다."
-'장례식장'이라는 아이디어는 어디서 얻은 겁니까?
"친구 아버님의 장례식장에 갔다가 교복을 입은 한 여학생을 봤어요. 다들 탁자에 둘러앉아 있는데 그 학생은 혼자 허탈한 표정으로 벽에 기대 있더군요. '이 여학생은 누구일까, 무슨 사연이 있기에 여기 있을까' 하는 궁금증에서 시작됐죠. 장례식장은 코미디가 벌어질 수 있는 가장 좋은 영화적인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인간적인 감정 중에서 공포와 두려움이 가장 매력적인 것 같아요. 다음 영화는 서사가 중심이 된 호러 영화를 만들고 싶어요. 다층적인 구조보다는 기승전결이 있는 드라마를 만들고 싶고요. 우선 100년 전 한국을 배경으로 자매가 등장하는 호러물을 준비 중입니다."
◆관객들 앞에서 낯뜨겁지 않았으면
-영화를 만들때 가장 중요한 게 뭐라고 보세요?
"시나리오 작업이 끝나고 촬영에 들어갔을 때 누구도 아닌 저를 위해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적어도 시나리오 단계에서는 프로듀서나 스태프의 조언을 들어야겠지만 촬영에 들어가면 흔들리지 말아야죠. 스태프들을 설득할 수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사실 제가 사교적인 성격이 아니라서 처음 현장에서는 공포감이 있었어요. 그런데 '연출자의 카리스마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현장에서 이 장면을 왜 이렇게 찍어야 되는지 얘기만 해줄 수 있으면 된다'는 홍상수 감독님의 말에 안심이 됐어요."
-어떤 영화감독으로 기억됐으면 좋겠어요?
"제가 앞으로 제 인생 속에서 상업 장편영화를 5편 이상 만들 수 있을지 고민이 많이 돼요. 하지만 제가 만든 영화로 관객들과 대화를 하는 것이 부끄럽지 않을 정도의 필모그래피를 가졌으면 좋겠어요. '장례식의 멤버'로 대화를 하면 어떤 관객은 저보고 너무 자신이 없다고 얘기하는데, 저는 부끄럽고 낯뜨거워요. 10년 뒤에는 여유가 생기겠죠."
-앞으로 영화를 통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지금까진 개인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한 것 같아요. 아주 사적이고 특별한 캐릭터를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였다면 앞으로는 집단과 사회에 관한 이야기를 했으면 합니다. 하지만 아직은 더 경험하고 배워야할 것이 많아요. 소설이든 영화든 전 스스로에 대해 평가가 야박한 것 같아요. 제 글쓰기가 역겹다느니 자폐아라니 하는 얘기를 많이 듣다 보니 한가지 설정을 하더라도 너무 작위적이진 않은지 의심을 하게 됐고요. 그래도 제가 완전히 노력을 했느냐를 늘 의심하는 게 좋겠죠. 끝도 없는 취재와 노력을 통해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순간이 올 때까지 노력을 할 겁니다."
장성현기자 jacksoul@msnet.co.kr 사진·정우용기자 vin@msnet.co.kr
▨ 백승빈은 누구?=1977년 대구 출생. 계성고, 계명대 미국학과 졸업. 소설가가 꿈이었던 그는 그저 영화를 배우고 싶어 다니던 입시학원을 때려치우고 한국영화아카데미에 지원했다. 영화아카데미 22기인 그는 '프랑스 중위의 여자'로 2007년 미장센단편영화제 '절대악몽'상을 수상했다. 한국영화아카데미가 제작지원하는 장편 '장례식의 멤버'로 2008년 부산국제영화제 뉴커런츠 부문 '특별 언급상'과 '아시아 영화진흥기구상' 등 2개 부문을 수상했다. 이어 제59회 베를린영화제 비경쟁 부문인 '포럼부문'에 초청되기도 했다. '아메리칸 뷰티'처럼 잘 만든 상업영화를 찍는게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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