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의 말(言)들은 날개를 달고 다닌다. 드넓은 바다를 건너 지구 땅 여기저기에 아무 데나 날아가며 때로 안착한다. 영국산 말과 미국산 말들의 날갯짓이 가장 활발하며 가장 많은 환영을 받는다. 한국도 영어가 환대받는 나라 중 하나다. 우리나라는 우리 말을 소홀히 하면서까지 영어를 반기기도 한다. 우리나라 말이 최근 인도네시아의 한 부족에게 환영받아 공식 언어로 채택된 일도 있지만 말이다.
수많은 외국어가 우리 주위에 범람하지만 최근 뜻을 몰라 곤혹스러웠던 말은 '엣지 있다'였다. 패션계 이야기를 다룬 한 방송사 연속극에서 자주 나온 대사라고 한다. '엣지'란 미국 속어로 물건에 대해서는 '개성 있다', 사람에 대해서는 '성깔 있다'는 뜻이라고 하는데 인터넷 검색을 해보고서야 알았다. 패션계를 사실적으로 다루기 위해 그 세계의 생생한 말을 쓰려는 제작진의 의도였겠지만 굳이 이 말을 썼어야 했나 모르겠다. 실상 패션계에서는 그 말을 쓰지 않는다고도 한다니 떨떠름할 뿐이다.
패션 용어는 외국어 일색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패션'이란 말부터가 그렇고 '패션'이 (서양) 옷의 '스타일'과 '트렌드'를 다루기 때문에 어찌 할 수 없는 측면이 있겠지만 때로는 너무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말까지 써야 하나 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라 언어를 다루는 기자 같은 사람에게는 우리 말에 대한 죄책감까지 느낄 정도다.
'레시피'란 말은 어떤가. 요리법을 뜻하는 이 말은 언제부터인가 자주 사용되고 있다. '팁'이란 말 역시 그렇다. 봉사에 대해 감사의 의미를 담아 얹어 주는 추가 요금이라는 의미 정도로 알고 있던 이 말은 '추가 핵심 정보'를 의미하는 말로 확대돼 사용되고 있다. 주로 케이블 TV를 통해서 많이 방영되는 국내외 요리 프로그램이나 패션 프로그램을 통하거나 그 분야에 종사하는 이들이 대부분 외국어인 그 계통의 용어를 그냥 쓰다 보니 확산된 것 같다. 이러한 외국어 중에는 한글로 대체하기 어려워 그냥 쓰이는 경우도 있지만 우리 말이 있는데도 놔두고 외국어를 쓰는 경우도 많다.
이러한 현상은 매우 심각하게 느껴질 만한 수준인데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데에 더 큰 문제가 있다. 국어학자들이나 우리 말을 사랑하는 사람 등 소수의 사람들이 우려하고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꼭 필요하지도 않은 외국어를 남발하고 있으며 그 상태는 큰 물이 둑을 넘듯 제어 단계를 넘어 버린 것으로 보인다.
외국어 남용의 문제는 꽤 오래된 현상이기도 하다. 1960년대와 70년대부터 일부 지식인 계층이나 전문가 집단에서 자신의 전문성을 은근히 과시하려고 외국어를 섞어서 말하는 버릇이 생겨났고 이로 인해 빈축을 사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외국어 남용이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광범위한 현상이 돼 버렸다. 미국이나 유럽이 주도하는 각종 문화가 유입되고 이것이 시대의 앞선 흐름으로 인식되면서 외국어를 사용하는 것이 유행에 뒤지지 않는 세련됨으로 인식되는 측면도 있다. 그래서 외국어 사용에 대해 흉보는 일도 없어지고 자연스럽게까지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외국을 옆집 드나들듯 하는 세상에, 영어 사용이 강조되는 세상에 웬 딴죽 거는 소리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 분위기가 우리 말을 더욱 위축시키는 것도 사실이다. '오렌지'식 발음보다 '오~륀지'식 발음이 외국인과 더 잘 소통할 수 있겠지만 '오렌지'식 발음으로도 외국인과 소통할 수 있다. 이는 우리 말과 발음 방식에 대한 자존심을 어느 정도 지키는 일이기도 하다. 외국인이 '한국식 영어'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점도 있어야 우리가 덜 억울하지 않겠는가.
1970년대 중반에 '우리 말 애용 운동'이 벌어진 적이 있었다. 축구의 '코너 킥'을 '구석차기'로, '골키퍼'를 '문지기'로 고쳐 사용하며 어색해하기도 했는데, 정말 '우리 말 애용 운동'이 필요한 시기는 요즘이 아닌가 한다. 외국어로 그냥 써도 될 듯한 말을 우리 말로 고쳐 쓴 과거의 우리와 좋은 우리 말을 놔두고 외국어를 남발하는 지금의 우리는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
김지석문화체육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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