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뺑뺑이를 돌았는지…." "지독한 고참이 있었는데…."
남자들이 술자리에서 자주 화젯거리로 삼는 것이 군대시절 얘기다. 훈련받느라 얼마나 고생했고 고참병들에게 어떻게 괴롭힘을 당했다는 식의 무용담이 줄줄 쏟아져 나온다. 서로 번갈아가며 군대시절 얘기 보따리를 풀어놓다 보면 술안줏감으론 제격이다. 여자분이 동석하고 있다면 금세 지겹다는 얼굴을 한다. 그게 그것 같은데 자기들끼리 신나 떠들어대니 그럴만도 하다. 정말 한국적인 풍경이다. 대화 주제가 없는 것도 아니고, 현실을 잊고 싶어서도 아니지만 그냥 그때 그 시절의 기억이 가장 극적인 형태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고생담이 훗날 즐거운 추억으로 바뀌는 것은 한국 남자들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재미있는 것은 대부분 제대하고 한동안 비슷한 꿈을 꾼다는 점이다. 꿈속에서 '군대에 다시 가야 한다'는 소리에 벌떡 잠을 깼다는 이들도 많다. 꿈에 동사무소 직원 혹은 병무청 직원이 찾아와 재입대 이유를 설명하는데 그것도 갖가지다. '서류가 잘못돼' '병역자원이 부족해' '동생 대신 입대해야' '국방부장관의 명령 때문에'…. 군 제대자들은 짧게는 1년, 길게는 10년 정도 이런 꿈을 꾼다고 한다. 무의식적인 강박관념이 꿈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다.
군대는 대한민국 청년들의 딜레마임에 틀림없다. 솔직히 군대를 원해서 가는 이가 얼마나 되겠는가. 2년 가까운 세월을 통제 속에 살아가야 하는데 병역을 소풍가는 것 정도로 가볍게 여기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대부분 청년들은 그냥 군대로 간다. 국방의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사회적인 요구 앞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다.
문제는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병역을 회피하는 계층이다. 최근 어깨탈구 수술로 경찰의 수사대상에 오른 이는 1천100명에 달한다. 병역 면제 과정에 적게는 수천만 원, 많게는 1억 원 이상 비용이 든다고 하니 돈 있는 집안이 아니면 어림없는 일이다. 국회의원, 부유층, 고위공직자 자녀의 면제율(5~6%대)이 일반인의 면제율(2%)보다 2, 3배 높은 이유일 것이다.
주기적으로 병역 비리 문제가 터지는 것은 일부만의 일탈행위가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병역필'이라는 딱지가 술자리 외에는 아무짝에 쓸모없는데 그걸 충실히 지키라고 요구하는 것은 모순이다. 애국심에 호소하는 '대가 없는 의무'라는 것은 현대 사회에 걸맞지 않다.
미국은 전쟁국가답게 군인을 우대하기로 유명하다. 지역 행사 때는 퇴역군인, 상이군인을 단상 맨 앞좌석에 앉히고 그들을 일일이 소개한다. 우리처럼 기관장, 의원, 동네 유지가 상석을 차지하고 누가 먼저 연설이나 소개를 할지에 신경 쓰는 것과는 정반대다. 미 국방부는 수십 년이 지나도 전사자 유해를 반드시 발굴해 국립묘지에 안장한다. 미 해병대는 아무리 전황이 불리하더라도 동료의 시신을 전장에 버려두지 않는다. 시신을 갖고 나오려다 멀쩡한 병사가 죽고 다치는 경우도 있다. 최소한 이런 환경은 돼야 국가의 이름으로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내몰고 개인적 희생을 강요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현실에 단기간에 군인이 존경받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은 쉽지 않다. 과거 정치군인들이 저질러 놓은 원죄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군인들이 고생하고 힘들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명예를 되찾으려면 어느 정도 세월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방법은 있다. 10년 전 없어졌던 군가산점제를 살리거나 획기적인 보상 방식을 찾아야 한다. 군가산점제는 지난해 말 한나라당에서 발의했다 폐기됐지만 국민적 공감대를 얻는 방안으로 좀 더 손질해야 할 것이다. 반대하는 여성단체들을 설득하고 타협하는 과정도 필요하다.
누구나 복무해야 하는 의무병 제도는 분명 문제가 있다. 당장 직업군인제로 바꾸기 힘든 상황이라면 병역 의무 이행자에게는 보상과 혜택이 당연히 뒤따라야 한다. 그래야 군대를 자랑스럽게 가고 군인을 명예롭게 보는 풍토가 만들어질 것이다.
박병선 논설위원 lala@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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