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관보 급인 정창영(55) 감사원 제1사무차장의 '신상명세서'에서는 특이한 경력이 눈에 띈다. 러시아 모스크바국립대학 법학 석사학위다. 해외 석박사 학위를 갖고 있는 고위공직자는 많지만 대부분이 영어권 국가 출신이란 점에서 낯설게까지 느껴진다. 그가 전공(성균관대 행정학과)과도 무관하고, 업무와도 별 연관이 없어보이는 러시아행을 택했던 데는 '특별한' 계기가 있었다. 그가 털어놓은 20년 전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가 1990년 경호처 감사담당관으로 청와대 파견 근무를 할 때였다. 어느 날 선대 고향인 구미 선산 출신의 한 후배가 러시아동포 한 명을 소개해줬다. 나중에 러시아의 '조선독립운동가후손협회' 초대 회장을 맡기도 한 고(故) 허진씨였다. 허씨는 건국훈장 최고 등급인 '대한민국장'을 추서받은 선산 출신 독립운동가 왕산 허위(1854~1908) 선생의 친손자다.
"한국과 러시아가 막 수교를 했던 무렵으로 기억됩니다. 허씨는 잊혀진 채 살고 있던 고려인(러시아동포)에 대한 한국 정부의 관심과 지원을 촉구하려고 노태우 전 대통령 면담 알선을 요청해왔습니다. 제가 한 일은 크게 없지만 그때부터 러시아와 고려인들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됐죠."
이후 정 차장은 업무 틈틈이 러시아어를 독학으로 공부했고, 1996년 유학길에 올랐다. 물론 언어 소통에 어려움이 적지않았지만 나름대로 성과도 거뒀다. 북한 김일성 주석의 원형 인물로 알려진 독립운동가 김경천(1888~1942) 장군의 후손을 찾아내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도록 도왔고, 러시아 민법을 번역하기도 했다.
"국적이 없다는 이유로 공적을 인정받지 못하던 독립유공자 후손들에게 자부심을 되찾아준 것은 공무원으로서 큰 보람을 느낍니다. '통일 한국'에 기여할 수 있는 경험도 쌓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정부 차원에서 고려인을 중심으로 한 러시아 내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하지 않아 국부 창출에까지 이르지 못했던 점은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정 차장은 1980년 행시 24회에 합격, 서울시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경북고 후배이기도 한 친동생 세영(53·삼중정보통신 대표)씨도 같은 해 행시에 함께 합격, '수재 집안' 소리를 들었다.
이후 1983년 감사원으로 전입해 공보담당관, 국책사업2과장, 대외협력심의관, 산업환경감사국장, 결산감사본부장, 제2사무차장 등 요직을 두루 거친 정 차장은 결단력 있는 일처리와 원만하고 포용력 있는 대인관계로 직원 상하간에 신망이 두텁다. 풍부한 감사 실무 경험과 기획력을 겸비, 사회적 파급효과가 크고 중대한 사안을 다루는 감사를 무리 없이 수행하는 등 감사 지휘에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워낙 감사원 업무에 정통한 탓에 직원들이 보고에 어려움을 느낄 정도라는 게 관계자들의 귀띔이다.
"스스로 생각해보면 제 장점은 호기심과 상상력이 풍부하다는 것입니다. 딱딱해 보이기만 하는 감사 업무도 알고 보면 창의성이 필요할 때가 많습니다. 공직 비리나 부패도 아이디어가 있어야 제대로 찾아낼 수 있거든요. 최상의 행정서비스 품질이 유지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곳이 감사원이라고 생각합니다."
대구 동성로 토박이인 그는 대학 진학때까지 대구 중구와 남구를 벗어나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만큼 한국전쟁 직후부터 본격적인 경제성장때까지 대구의 옛 모습을 잘 기억하고 있다. "일년에 서너번은 고향을 찾지만 매번 답답함을 느낍니다. 대구가 양적 팽창은 이뤘어도 질적으로는 여전히 낙후돼 있기 때문이죠. 다른 분야는 잘 모르지만 대구에도 명예감사관제도가 도입된다면 전문성을 살려 지역 발전에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그에게서 발견한 특이한 점 하나 더. 50대 중반이면서도 10대, 20대가 좋아할 법한 최신 휴대전화를 쓴다. 인터뷰 도중에도 양 손을 이용,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속도가 꽤 빠르다. "제가 나이에 비해 '얼리 어답터'에 속하는 편이죠. 시대 흐름에 뒤처지지않게 많이 노력합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이상헌기자 dava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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