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처음으로 경상북도교육청과 함께 실시한 제22회 매일한글백일장 공모전에는 모두 1천924점의 수준높은 작품들이 응모해 모두 89편이 당선의 영광을 안았습니다. 운문과 산문으로 나눠 실시된 이번 백일장에서는 신설된 초등부를 비롯해, 중등부와 고등부 및 일반부에서 실력을 겨뤄 전체 대상(1명)과 각 부문별 장원(1명), 차상(1명), 차하(2명), 장려상(3명)이 선정됐습니다.
다름을 거둔 첫 행보(行步)
박신자(성주군 성주읍)
"얘야 점심 먹고 논에 함 가보자, 피가 떨어지기 직전인기라."
마침 봉사계획이 취소되었다는 전화를 받은 터였다.
지난여름 갑자기 허리를 삐끗한 목장주인 남편 대신 식구들 모두 젖소 돌보기에 신경 곤두서있다. 아버님 어머님께서도 근 석 달가량 젖소를 먹일 청초를 베러 다니시다 보니 해마다 여름이면 늘 상 하던 피 뽑기가 그만 때를 놓치고 만 거였다. 첫날은 집 옆 작은 논을 택했다. 비닐포대기 들고 물 장화를 입은(?) 모습으로 논에 들어서니 벼가 어느새 허리께를 넘실거렸다. 그보다 한 뼘은 더 웃자라 보이는 피는 금세라도 씨앗을 터트릴 것만 같았다. 게다가 뿌리까지 뽑는 것은 엄두도 안 날 만큼 가지를 벌려 골속 골속 품은 대궁은 참말 강해보였다. 멋모르고 처음엔 아무리 돌려가며 끊으려 해도 끄덕도 않던 그것이 어머님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 중간마디 부분을 뚝 꺾으니 냉큼 떨어졌다.
질척한 논바닥을 딛고서 움직이는 것이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닌 듯 한동안 피를 뽑고 있자니 다리가 저려오고 손도 아파왔다. 그러다 고개를 들어 뒤돌아본 논엔 그 기고만장해 보이던 피도 부러진 모가지만 머쓱했다.
"산 밑 다랑논에 피는 짬짬이 시간 나거든 뽑아라." 말씀하신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지만 첫날 그렇게 어머님과 함께 작업을 한 뒤로 한동안 짬이 없었다. 지난여름에 개강한 어르신 한글교실이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어 한 자라도 더 알게 하고 싶어 안달을 하던 때였다. 차일피일 미루다 추석이 다가오자 딴엔 머릴 굴렸던 어르신 한글교실도 종강을 했고 다음날 오후에 논에 들어갔다. 손으로 뽑다가는 해 넘어가기 전에 다 못할 듯해 작은 낫을 하나 챙겨들었다. 어머님과 도란도란 얘기 나누며 함께하던 때완 달리 시간은 어이 그리 잘 가는지 두 묶음 정도 뽑고 나니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려 했다. '얼씨구나 나도 머리가 돌아가는구먼'하면서 하나씩 뽑던 것을 서너 개씩 모아서 베고 보니 피 포대가 빨리 찼다. 그런데 조심스레 뽑을 때보다 일은 수월한 듯한데 피 씨앗이 조금씩 논바닥에 떨어지는 거였다. 초여름 벼를 제치고 웃자라기 시작할 때 뽑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내년에 또 피 농사를 짓는 것은 아닌가 싶었다.
피는 처음 모내기를 할 땐 모습이 너무 닮아 품종이 다른 벼인가 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벼 포기를 제치고 더 깊이 뿌릴 내리기 시작하면서 기어이는 제 본모습을 드러내어 사람들이 원하지 않는 씨앗을 품는다. 끊임없이 뽑아도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두고두고 대를 이어가는 피는 밉상스럽게 정말 무용지물(無用之物)로만 뇌리에 남아 있었다. 시골에서 자랐으며 아씨 시절을 제외하고라도 결혼하고 나서 벼농사를 짓는 남편 곁에서 조금씩 도와주며 지내왔는데도 말이다.
추석까지 겹쳐서 몸살깨나 앓고 난 뒤 갑자기 피는 어떤 식물일까 궁금증이 일어 인터넷 사전을 열었다. 그러자 평소 상식과는 의외의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피는 구황(救荒)작물이기도 했으며 잎은 부드러워서 사료용으로도 매우 적합하다고 한다. 벼와 경쟁하여 자라면서 벼 작황에 피해를 주어서 그렇지 비록 작은 알맹이지만 영양가치도 벼나 보리에 못지않다고 하니 참 재미있는 사실을 늦게 알게 된 것이다. 즉 또 다른 작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는 것이건만 단지 벼 포기 사이에서 안간힘을 쓰며 생존 경쟁을 하다 보니 정말 나쁘고도 쓸모없는 잡풀처럼 여겨진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자기 자리가 아니면서 고집스레 붙잡고 있다 보면 꼴사나워지는 것이나 나쁜 행동이나 말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알면서도 고치지 않으면 몸에 배어 정작 떼어내야 할 때 힘이 듦을 말이다.
'나 비록 뽑혀나가지만 당신은 정말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가? 아님 남의 자리에 얹혀서 닮음꼴이 아니라고 탓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진정 자신의 참 모습이 뭔지 알기는 하는지 생각하라!'
그런 무언의 충고를 와르르 쏟아내며 씨알 터트리는 이 가을, 잠시 느림의 여유를 부려보자.
그러다 보면 무디어진 날을 갈아 단지 다름으로 오류가 된 진실을 캐낼 수도 있지 않을까?
서둘러 거두어들이려고 분주하기보다 먼저 버릴 것을 찾을 줄 아는 현명한 판단력 또한 기를 일이다.
가을 들녘엔 온갖 곡식들이 앞다투어 거두어 달라고 기다리고 있다. 이런 눈에 뵈는 것들만 거두어들인다 할 것인가! 자신을 바로 알고 줄줄 아는 사랑에 찬 그런 참삶에 대한 생각을 새삼 깨닫는 것 이 또한 먹을거리 못지않은 거둠이라면 억지일까?
가을걷이 준비로 시작된 첫 행보(行步)는 그렇게 다름을 알게 한 또 다른 거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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