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마 유치환은 "나의 시성(詩性)을 일깨워 준 건 고향의 맑고 고운 자연"이라고 했고 김춘추 시인도 "통영이 내 시의 뉘앙스가 돼주었다"고 술회했다. 음악가 윤이상은 차원을 높여 "미륵도에서 우주의 소리를 들었다"고 회고했다. 박경리, 전혁림, 김상옥, 윤이상 등 통영은 많은 예술인들을 배출한 예향이다. 이들은 이곳의 자연 속에서 문학적 시상(詩想)을, 회화적 영감을, 교향악의 악상을 떠올렸다. 그 한켠에 미륵산이 있다. 이 산은 통영의 한복판에서 무게중심을 잡아주며 지역민의 정서를 넉넉히 품고 있다. 미륵산은 종교적으로 는 미래에 중생을 구제할 미륵불의 상징으로, 지리적으로는 다도해와 자연을 아우르는 지표로 통영의 랜드마크로서 뿌리를 내렸다.
◇통영 중심에 우뚝…용화사 등 자리 잡아
통영은 임진왜란 이후 군사도시로 발전하면서 독특한 문화가 형성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세병관, 제승당 등 군사시설이 들어서 도심 전체가 병영으로 기능했다. 더욱이 한산도에서 임란 최대의 승전고를 울림으로써 호국의 도시로도 이미지를 굳혔다. 남해지방은 일찍부터 풍부한 해산물과 어장을 바탕으로 자본축적이 가능했다. 일찍이 '통영 가서 돈자랑 하지 마라'는 속담도 회자될 정도. 이런 경제력을 바탕으로 유학생이 생겨나 통영엔 일찍부터 선진문물에 눈뜬 지식인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이런 인사들이 지역에서 교류하고 창작 활동에 몰입하면서 통영은 전국적인 문화예술도시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 도시의 중심에서 지역을 아우르며 구심체로 우뚝 선 산이 있으니 이곳이 미륵산이다. 미륵산은 단순높이로 461m로 높은 산은 아니지만 산정에 올라서면 다도해와 인근해역이 한눈에 들어오는 최고의 전망터로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산자락에 용화사, 미래사, 도솔암, 관음사 등 사찰이 자리 잡고 있어 미륵신앙의 든든한 후광이 되고 있다.
취재팀은 세포고개를 들머리로 산행에 나섰다. 오늘 등산로는 현금산, 미륵산, 용화사로 내려오는 8km 코스. 이때쯤 전국의 산들은 잡목에 앙상한 나뭇가지뿐이겠지만, 이곳엔 제법 컬러가 살아있다. 소나무가 우거진데다 가끔씩 동백나무, 편백군락까지 펼쳐져 모처럼 색감에 물씬 빠져보기에 좋다. 색이 귀한 겨울에 이만한 호사도 없을 듯하다.
◇바다와 도시가 이루는 원색의 조화
현금산은 밋밋했다. 흔한 정상석 하나 얻어달지 못하고 나뭇가지에 매달린 송판이 표지판을 대신하고 있었다. 20분쯤 진행하니 커다란 전망바위가 나타났다. 웬만한 아파트 한 동(棟)은 됨직한 이 바위는 쉽게 정상을 허락하지 않는다. 암벽 타듯 가파른 절벽을 네 발로 기어올라 겨우 바위에 올랐다.
순간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들. 와~, 비경 앞에서는 감성이 항상 이성보다 앞선다. 자동차로 한참을 빠져나왔던 통영 시내가 손가락 앵글 속으로 빨려든다. 파란 청정 해역을 끼고 오밀조밀 붙어있는 도시의 주택들이 푸른 바다와 색 대비를 이루었다. 지붕, 담벼락의 아름다운 채색으로 유명한 동피랑을 통해서 알려졌듯 통영은 컬러풀의 도시다. 항구와 도시와 가옥에 펼쳐진 원색의 조화는 원조격인 나폴리와도 견줄 만하다. 이때 낯익은 풍경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산양면 쪽 논밭의 이랑들이 부드러운 물결을 이루며 퍼즐처럼 펼쳐져 있다. 마치 설흘산 밑의 다랑논을 연상케 한다. 밭두렁의 부드러운 곡선은 바다의 원색에 지친 시력을 편안하게 씻어준다. 들녘도 풍경이 되는 전망대의 감동을 남겨두고 취재팀은 미륵산으로 곧장 나아간다. 미륵치를 지나 급경사를 10여분쯤 오른다. 가쁜 호흡 위로 하늘이 활짝 열리는 듯하더니 오늘의 목적지 미륵산 정상이 나타났다.
시원한 바닷바람에 땀을 식히며 다도해를 굽어본다. 점점이 흩어져있는 섬들, 마치 누군가 구도를 맞춰 손으로 뿌려놓은 듯하다. 미륵산 정상의 백미는 단연 다도해의 풍경과 일망무제로 펼쳐지는 조망이다. 통영시내 뒤쪽으로 한산도 용초도가, 서쪽으로 사량도 추도가, 남쪽으로는 비진도 연화도 욕지도가 파노라마를 이루었다.
◇충무공의 해진, 눈앞에 펼쳐지는 듯
미륵산에 오르고서야 통영이 왜 예향으로 일컬어지는지 이해가 될 것 같다. 이곳에서는 누구나 비경을 표현할 시어(詩語)를 찾고, 풍경의 각(角)을 잡아 상상의 캔버스를 펼친다.
정상에선 문화해설사 한 분이 충무공의 한산도 해전 설명을 하고 있다. 한산도는 미륵산 정상에서 손금 보듯 들여다보이는 까닭에 이분의 설명은 동영상을 보는 듯 리얼하게 느껴진다. 한산도 인근은 물살이 빠르고 수심의 변화가 심해 전술구사에 유리한 지형을 하고 있다. 충무공은 1592년 3차 출전에서 유명한 학익진(鶴翼陣) 전술로 적함 59척, 수군 8천여명을 수장시켜 제해권(制海權)을 장악하고 호남 곡창지대를 지켜냈다. 도요토미는 이 싸움 이후 조선 수군과의 싸움을 전면 금지시켰고 이 결과 왜군의 수륙병진 작전이 완전히 와해되었다. 이 싸움은 살라미스 해전, 칼레 해전, 트라팔가 해전과 함께 세계 4대 해전 중의 하나로 당당히 올라있다. 지금은 그 현장 위로 큰 화물선들이 포말을 일으키며 해역을 바삐 오갈 뿐. 해설사의 웅변에 우린 잠시 노를 젓는 노꾼도 되고 활시위를 당기는 수병(水兵)도 되는 상상에 빠졌다.
◇박경리, 윤이상 등 예술인 배출
취재팀은 충무공의 호국정신을 되새기며 하산길에 들어선다. 역사학자들은 충무공을 영웅호칭에 격을 더 높여 성웅(聖雄)으로 추앙했다. 영웅 호칭은 일반적으로 반대파들과의 살육 과정의 산물이기 때문에 성인(聖人)과 거리가 멀 수밖에 없다. 세계 역사상 군인 중에 성인칭호를 받은 분은 충무공이 유일할 것이다.
이런 충무공의 혼이 서린 통영은 예술가들에게 흩어진 심신을 바로 세우고 국가관을 정립하는데 영향을 주었다. 그래서인지 이곳엔 지조 있는 예술인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그들은 지역의 넉넉한 부(富)와 명성을 기반으로 얼마든지 양지의 길을 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상당수는 항일로, 반독재로 저항의 길을 걸었다. 통영의 시민들은 이들의 이념적 편향을 구분하지 않고 그들의 작가정신을 기리고 있다.
충(忠)을 위해 헌신한 충무공과 나름대로 의(義)의 길을 걸었던 이들의 노선(?) 차이에 대한 해석은 독자들의 몫이다.
글'사진 한상갑기자 arira6@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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