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엄원태의 시와 함께] 긴 나무의자/ 이하석

바람과 비에 바랜 채

햇빛 속 하얗게

기다리고 있는 긴 의자

거기 앉아서 남자가 여자의 어깨를 밀어 쓰러뜨리면

여자의 머리는 의자 밖으로 빠지고

의자의 다리 하나가 문득 삐걱댄다

사랑이 가볍지 않고 한쪽으로 너무 기운 탓이다

숲이 끊임없이 사운대고

깊이 알 수 없는 늪의 개구리들은 요란히 운다

어딜 향하든 길들이 급하지 않다

사랑이 아니라도 아무나 의자에 앉으면

숲 아래 잠든 물빛에 숨죽일 것이다

그의 다리와 의자의 다리는 튼튼해서 외롭고

때로 무너져 다시 고쳐 놓으면 의자는

제 깡 한동안 유지하려 애쓴다

숲으로 들어가는 길과 숲에서 나오는 길목에

의자는 성실하게 앉아 있다

때로 달빛이 물컵 엎지를 것처럼 쏟아져내려도

의자는 기다리고 있다

어쩔 수 없이 버티며

늘 지난 일처럼 앉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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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의 정서를 최대한 제거해버리고, 객체/대상에 직핍하는 언어로 사물에 내재하는 미묘한 '아우라'를 드러내 보이는 데 탁월한 시적 성취를 보여 온 이하석 시인이다. '긴 나무의자' 역시 그러한 면모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의자란 게 그러하다. 바람과 비에 바랜 채/햇빛 속 하얗게/기다리고 있는 '것들'이다. 의자도 현실의 실체인 한 '존재의 부대낌'에서 예외일 수 없을 터. '사랑'에 부대껴서 다리 하나가 문득 삐걱대거나 기울기도 한다. 때론 다리가 너무 튼튼해서 외롭기도 하다.

의자는 그렇다. 때로 무너졌다가도 제 깡 한동안 유지하려 애쓰고, 무언가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으며, 어쩔 수 없이 버티며 늘 지난 일처럼 무심히 앉아 있다. 당신은 어떠한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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