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비자금이 화두다. C&그룹을 비롯해 한화, 태광그룹이 비자금 조성 혐의로 검찰의 수사를 받고 있다. 정경 유착의 관행이 남아 있는 한국 사회에서 잊혀질 만하면 터지는 것이 비자금 문제다. 비자금 하면 연상되는 것이 금고다. 비자금과 금고는 바늘과 실의 관계다. 거액의 비자금은 차명계좌를 통해 관리하지만 통장과 거래 기록은 비밀 금고에 보관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한때 금고는 개인의 자산과 비밀을 보호하는 최고의 수단이었다. 금융업이 발달하면서 점차 일반인들의 관심에서 멀어졌지만 여전히 금고는 현대 경제를 떠받치는 한 축으로 기능하고 있다.
◆경기 따라 울고 웃는 금고업
한국에 금고업이 싹트기 시작한 시기는 1970년대다. 경제개발이 시작되면서 금고에 대한 수요가 늘어났기 때문. 금고업이 호황기를 누린 것은 한국 경제가 본격적으로 팽창했던 1980~90년이다. 신도시가 건설되면서 건물과 사무실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났고 경제 개발 수혜로 부자들이 양산되면서 금고 수요가 급증했다.
그러다 금융업이 성장하면서 현금과 귀중품을 금융권에 맡기는 경향이 강해지고 사설 경비업체까지 등장하면서 금고업은 예전만 못해졌다. 특히 대구의 금고업은 경기침체라는 직격탄을 맞았다. IMF 사태 이후 줄곧 경기가 내리막길을 걷는 바람에 새로운 금고 수요가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구에서 금고를 가장 많이 구경할 수 있는 곳은 종로다. 종로에는 중앙·한일·동양 등 금고를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곳이 5개 정도 있다. 40년 동안 대구에서 금고를 제작 판매해 온 안병하(73) 씨는 "일반적인 소모품과 달리 금고는 반영구적인 제품이다. 한번 구입하면 오랫동안 사용하기 때문에 신규 수요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대구의 경우 경기가 너무 나빠 금고 수요가 많지 않다. 과거에 비해 매출이 턱없이 부족해 종로에서 운영하던 가게를 폐업했다"고 말했다.
◆어떤 사람들이 찾나
금고는 크기에 따라 크게 가정용과 업무용으로 구분된다. 가정용은 보통 높이가 1m를 넘지 않는다. 반면 업무용의 경우 작은 것은 높이 80㎝, 큰 것은 높이가 180㎝에 이른다. 국내 금고 수요의 대부분은 업무용이다. 개인 수요자는 많지 않다고 한다. 개인 수요자에 대한 이야기는 취재 과정에서 쉽게 들을 수 없었다. 고객의 비밀을 지켜주어야 하는 것이 금고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상도덕이기 때문이다.
개인 금고를 찾는 사람들은 부유층 가운데 귀중품을 많이 가진 사람들이다. 금고에 넣어 둘 수 있는 현금의 양이 많지 않기 때문에 금고에는 돈 대신 주로 귀중품을 보관한다고 한다. 금융기관에서 제공하는 대여 금고를 활용해도 되지만 노출되는 것이 부담돼 개인 금고를 사용한다는 것. 이들은 일반 금고보다 벽 또는 바닥을 뚫고 금고를 설치하는 매립형 금고를 선호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금을 많이 보관해야 하는 사채업자의 경우 아예 지하실을 금고로 개조한 사례도 있다고 한다.
부유층의 개인 금고 선호 현상은 가끔 터지는 굵직한 사건을 통해 드러난다. 지난 2006년 금고털이범이 검거되면서 재벌가의 개인 금고가 화제가 됐다. 범인은 매주 수요일마다 서울 성북동과 한남동 일대 재벌 회장 집 등을 골라 강도 행각을 벌인 것으로 알려졌다. 성북2동 모 기업 대표의 집에 침입, 가정부를 묶어 놓고 망치로 금고를 부순 뒤 다이아반지 등 1천300만원 상당의 금품을 챙겼다. 또 한남동 모 그룹 회장 집에서는 다이아몬드, 진주, 비취, 금열쇠 등 보석과 달러 등 5억원대의 금품을 털었다.
◆금고의 진화
드라마 또는 영화를 보면 청진기를 이용해 금고를 여는 장면이 종종 나온다. 이에 대해 금고 제작자는 말도 안 되는 장면이라며 손을 내저었다. 초창기 모델의 경우 다이얼이 정교하지 못해 감각으로 번호를 알아낼 수 있는 여지가 있었지만 금고 제작 기술이 발달한 지금은 어림도 없다는 것.
초창기 금고는 다이얼을 돌려 번호를 맞추는 형태가 대부분이었다. 2000년 들어 금고에도 디지털 바람이 불면서 다이얼이 버튼식 디지털키로 대체됐다. 최근에는 디지털키가 터치식으로 바뀌었고 지문인식 기능이 추가된 금고가 출시되고 있다. 다이얼 금고도 생산되고 있지만 찾는 사람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요즘 제작되는 다이얼 금고도 정교한 기술이 적용되기 때문에 손 감각만으로는 열 수 없다고 한다.
화재에 소실되지 않도록 설계된 내화금고 속에 넣는 내화재도 세월의 흐름에 따라 많이 바뀌었다. 과거에는 불에 볶아 습기를 없앤 모래 또는 시멘트 등을 넣었지만 지금은 특수 내화재가 사용된다. 지난 2004년 발생한 낙산사 화재에서 국산 금고의 내화성은 입증됐다. 보물 479호 동종마저 녹아내릴 정도의 화마 속에서도 금고 속 귀중품은 손상을 입지 않았다고 한다.
기능뿐 아니라 외향 면에서도 금고는 진화했다. 투박하고 칙칙한 컬러에서 탈피해 가구로도 손색이 없을 만큼 디자인이 화려해졌다. 블랙 또는 와인 컬러 위에 꽃무늬, 클림트와 고흐의 명화, 스와로브스키 크리스털 장식 등을 수 놓은 제품들이 속속 출시되고 있다.
지역의 금고제작업체인 중앙금고 홍석진 실장은 "과거에는 철판에 도색을 했기 때문에 금고 디자인이 단조로웠다. 요즘에는 철판에 광택제 또는 시트지 등을 붙여 세련된 디자인을 연출한다. 냉장고나 와인셀러로 착각할 정도로 색감이 화려하다. 고객들의 요구 수준이 갈수록 다양해지고 있기 때문에 어둡고 부정적인 이미지를 깬 금고들은 점점 더 많이 출시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설명했다.
간편하게 들고 다닐 수 있는 휴대용 개인금고도 등장했다. 고가의 IT 기기나 반지, 시계, 목걸이 등을 수납하기에 적당해 휴가철 갖고 다니기에 제격인 소형 금고다. 잠금 장치와 GPS를 내장하고 있어 도난 시 위치 추적이 가능한 것이 특징이다.
이경달기자 sarang@msnet.co.kr 사진·성일권기자 sungi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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