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여인, 장계향이 21세기 여성들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나오고 있다.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여성들에게 장계향은 어떤 의미인가.
최근 장계향(1598~1680)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최근 장계향선양회가 권역별 발대식을 가진 데 이어 24일에는 장계향 평전이 발간될 예정이다. '장계향 선양회'는 장계향의 삶과 업적을 기리고 현대 여성의 삶의 지표로 삼고자 민간이 주도가 돼 만든 경북여성인물 선양단체. 장계향 아카데미를 거쳐간 1천400여 명이 중심이 돼 장계향 선양회가 조직됐다.
그녀는 과학자이자 인(仁)의 철학자, 사상가, 시인이자 화가로 불리고 있다. 그의 삶을 들여다보면 이런 수식어가 과장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7세기 이상을 실천한 행동파 여성
장계향이 살던 17세기는 성리학의 이념이 최고의 이상이었다. 장계향은 그 시대 성리학 이념에서 가장 성인의 삶에 가깝게 실천하며 살았다.
어릴 때부터 공부에 소홀하지 않았으며 최선을 다해 가정을 이끌었다. 특히 그의 자녀 교육은 오늘날에도 빛나는 대목이다. 그는 아들들에게 "학문을 잘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얼마나 사람답게 사느냐가 중요하다"고 누누이 가르쳤다. 그녀는 과거를 위한 경전 공부가 아닌 유교적 가르침의 본질을 찾아 실천하려는 태도를 지녔다. 이런 태도는 훗날 그녀의 자손들이 영남학파를 대표하는 학자로 성장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여성의 활동이 흔치 않던 시절, 가정을 중심으로 시인이자 화가, 서예가, 사상가, 교육자, 사회사업가 등 1인 다역을 해냈다.
◆과학자 장계향
조선시대 여성이 책을 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신사임당이나 허난설헌도 문학작품을 남겼을 뿐 스스로 책을 집필하지는 못했다. 게다가 340년 전인 1670년경만 해도 요리책은 흔한 책이 아니었다. 고조리서 연구가인 이성우 교수는 "아시아에서 여성에 의해 쓰여진 가장 오래된 조리책으로, 세계 음식문화사에 특별한 의의가 있다"고 평가했다. 이 책은 146가지 음식의 조리 과정을 아주 구체적으로 설명해 놓은 본격 요리서로, 지금도 따라할 수 있을 정도로 실용적이다. 어법과 철자 등이 정확하게 표현돼 있어 국어사적으로도 가치가 크다. 이제 음식디미방은 경북 영양의 대표 브랜드가 됐다.
◆행복 리더십의 전도사
박희택 경북여성정책연구원 객원연구위원은 장계향의 '행복 리더십'에 주목한다. 장계향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직후에 태어난데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일어나 시대의 고통이 컸다. 전실 자식이 둘이나 있는 곳에 시집을 가 삶의 무게가 만만치 않았음에도 덕의 실천으로 행복을 추구했다. 재령 이씨의 재물을 구휼에 사용하고 재물로 부족한 것은 도토리 나무를 심어 구휼했다고 전해진다. 이웃에 부모를 잃은 아이, 늙어서 자녀가 없는 사람, 의지할 곳 없는 사람을 성심으로 도왔다. 덕을 베풀고도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않는 겸손함으로 일관해 후대까지 칭송을 받고 있다.
◆21세기 여성에게 주는 의미
그렇다면 오늘날 장계향이 21세기를 살아가는 여성들에게 어떤 의미를 지닐까.
경북여성정책개발원 이영석 교육인재개발실장은 "그의 삶을 오늘날 재해석해 보면 자신의 생각을 가족 테두리 안에서 충분히 발현했을 뿐 아니라 정신적 교육자로서 '어머니'의 이상향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장계향의 자녀 교육관'에 관한 박사논문을 준비 중인 김춘희(김관용 경상북도지사 부인) 씨는 "장계향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떻게 살 것인가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창조적인 인물"이라면서 "당시 성리학이 시대를 감싸 안지 못한다는 한계를 깨닫고 하루에 수백 명의 죽을 끓여 먹이는 구휼을 베풀었으며 군자로서 살아간 삶 자체가 자녀들에게 큰 교육이었다"고 말했다.
최세정기자 beacon@msnet.co.kr
1598년 안동 금계리에서 아버지 경당 장흥효와 어머니 안동 권씨 사이에 외동딸로 태어나다
1608년(11세) 소학, 십구사략 등을 스스로 깨우치다
1616년(19세) 석계 이시명과 혼인. 이시명은 광산 김씨와 사별하고 1남1녀를 두었다. 당시 시집에는 시부모, 시댁 형제 가족, 사랑채 손님 등 40여명이 살고 있었다.
1634년(37세) 이복 큰동생을 시댁으로 데려와 가르치다(이후 친정식구 모두 집근처로 이사시키고 제사도 지내다)
1636년(39세) 병자호란 발발
1640년(43세) 영해 석보면 원리동으로 완전히 이주하다. 모은 재산을 큰조카에게 물려주고 나오다.
1652년(55세) 병자국치를 슬퍼해 영양군 수비로 다시 이사해 은거를 시작하다. 식구 30여 명과 함께 살다. 자식들에게 본격적으로 강의하는 남편을 따라 명상과 학문, 노동과 인생의 재발견을 위한 생활을 하다.
1664년(67세) 손자 신급, 성급에게 학문을 권려하는 오언시를 써주다.
1672년(75세) 한글 최초의 요리서 '음식디미방'을 저술하다. 가뭄이 극심해 자식들을 모두 산 아래 세상으로 내려보내고, 부부만 안동 도솔원으로 옮겨 초근목피로 생활하며 자족하다.
1673년(76세) 남편 이시명 운명(85세)
1680년(83세)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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