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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창] 영어의 추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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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어느 나라든 경쟁상품이란 게 있다. 예컨대 스위스는 시계, 일본은 자동차, 우리나라는 TV와 반도체 등등이다. 그렇게 대표선수를 내세우자면 영국은 '영어'가 바로 그것이다.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영어교육에 쓰이는 돈이 연간 17조원에 달한다고 한다. 그러니 영어 원주민들은 세계 어느 곳을 가더라도 빈털터리가 되면 자기가 쓰는 말을 가르치는 것만으로도 생계를 유지할 수가 있다. 스스로 노력한 것도 아닌, 순전히 조상 덕이다.

국제학회나 회의를 가도 공식 용어는 영어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무리 훌륭한 학설과 제안이라도 영어로 소개하거나 설득하지 못하면 그 가치를 인정받기가 어렵다. 주옥같은 논문이라도 미국이나 영국 같은 영어권의 학술지에 영어로 실려야 세계적으로 인용이 되고 비로소 '우수논문'으로 쳐준다. 그런데 쓰고 출판하는 것은 시간이라도 충분히 있어 차라리 사정이 낫다.

문제는 상황이 수시로 변하는 회의나 협상이다. 그런 곳에서는 말이 유창한 사람들이 무조건 유리하다. 외국어를 아무리 잘한다고 한들 모국어를 쓰는 사람만큼 유창할 수야 있을까? 한미 FTA(자유무역협정)의 문서에 최근에도 상당 부분에서 번역의 오류가 발견되었고, 내용의 뜻을 우리만 착각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도 한 예다. 그런데 '벙어리 냉가슴'이라고 말 못하면 당하기만 하나 싶지만 또 다른 얘기도 있다.

몇 년 전에 미국의 수도인 워싱턴DC에서 방문교수로 있을 때였다. 세계 정치의 중심이라는 명칭에 걸맞게 각국의 외교관들로 북적대는 그 곳에서 믿기지 않는 이야기를 들었다. 중국 외교관들 중에는 영어에 별로 능통하지 못한 이들이 많다는 것이었다.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는 중국인들을 많이 본 터라 이해가 안 된다고 했더니 이유가 있었다.

원래는 '영어의 달인'쯤 되는 외교관들을 배치했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결국 외교협상에서는 미국 측에 계속 밀리기만 했다. 그래서 원인을 하나하나 되짚어 보았다. 그랬더니 오히려 영어를 너무 잘 알아들어서 모국어로 말하는 상대에게 회유와 설득만 당했다고 판단하고는 아예 작전을 바꾸었다. 영어를 적당(?)히 구사하는 이들로 배치해서 "다른 이유들은 잘 못 알아듣겠고, 어쨌든 우리 주장은 이렇다"고만 밀고 나가니 차라리 협상에서 유리하였다고 한다.

사실 믿거나 말거나한 얘기지만 억지주장을 일삼는 국가들에는 오히려 끌려다니는 미국을 보면 전혀 낭설만은 아닌 듯도 하다. 가장 설득하기 어려운 맞수는 '말귀를 못 알아듣는' 상대다.

그런데 이렇듯 대단한 영어가 무시당하는 곳도 있다. 인천공항 면세점에 들어서는 명품점 직원 모집에 중국어와 일어 능력이 우선이고 영어는 상관이 없단다. 중국과 일본 손님이 거의 30%를 차지하고 영어를 쓰는 손님은 1%에 불과하기 때문이란다. 돈 앞에는 그 막강한 영어도 맥을 못 추는 모양이다.

정호영<경북대병원 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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