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닥터 최의 세상 내시경] 사회 지도층의 도덕성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단어 그대로 '귀족 사회의 도덕적 의무'란 뜻으로 유럽 왕정시절, 귀족의 특권에 따른 의무를 가리키는 말에서 비롯됐다.

당시 귀족들은 생사를 가르는 전투에서 최일선의 지휘관으로 자원해 싸웠고, 이를 더없이 명예롭게 여겨 명문가일수록 전쟁으로 희생된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포클랜드전쟁 당시, 헬기조종사로 참전한 영국의 앤드류 왕자는 최악의 경우 전함으로 날아드는 미사일의 표적이 되는 전함 호위의 임무를 자진해 맡았고 바로 이런 오블리주가 있었기에 오늘날까지 영국왕실의 위엄이 이어질 수 있었다. 유럽사회의 이러한 전통은 민주주의와 접목돼 지금까지도 면면히 이어져 내려와 사회 리더의 덕목으로 자리 잡았고, 그것은 오늘날 유럽인들이 세계를 움직일 수 있는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다.

최근 저축은행 사태를 계기로 금융시장에 대한 국민의 불신이 최고조에 달하고 있다. 무려 7조원대의 금융비리를 저지른 것으로 드러난 부산저축은행은 부산지역 서민들을 패닉상태에 몰아넣었을 뿐 아니라 금융기관의 도덕적 해이의 극치를 보여주면서 국민들에게 실망과 허탈함을 넘어 분노마저 느끼게 했다.

또 잇단 금감원 직원들의 비리사건은 금융의 감독과 감시 역할을 해야 할 '경제 검찰'로서의 금감원 권위를 스스로 추락시켰다.

한술 더 떠서 저축은행 영업정지 전날, VIP고객들의 예금이 무더기로 인출된 사실이 드러났다. 특히 이 일에 금감원 직원과 부산지역 국회의원들이 연루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파장은 일파만파로 커졌다.

이번 사태로 무엇보다 걱정스러운 것은 땅에 떨어진 지도층의 도덕성이다. 사회 지도층의 도덕성이 의심받고, 거대한 불신의 벽에 가로막혀 있는 사회는 한마디로 미래가 어두운 사회이다. 기득권적 지위를 이용해 영업정지 사실을 미리 빼낸 은행의 임직원과 친인척들, 일부 사회 지도층 인사들은 저 혼자 살겠다고 닫힌 은행 문을 불법적으로 열어 너도나도 돈 빼가기에 바빴다. 참으로 참담한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이 어이없는 일들을 보면서 트위터에서 한 논객은 이들 부도덕한 인사들을 임진왜란 때 함락되는 동래성을 버리고 도망간 경상좌수사 이각과 박홍에 비유했다.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킨 왜군은 부산진성을 함락시키고 그 기세를 몰아 동래성으로 밀어닥쳤는데, 당시 동래부사 송상현은 죽더라도 절대 길을 내줄 수는 없다며 싸웠지만, 함께 맞서 싸우기로 약속한 경상좌수사 이각과 박홍은 비겁하게 달아나고 말았다.

결국 송상현 장군 홀로 장렬히 결사항전하다 순국했는데, 이번 사태는 당시 역사 속의 일화와 상당히 닮은 구석이 있다. 절묘한 비유 같다.

21세기 이각과 박홍으로 지목돼 버린 이름 모를 그들을 생각하면서 새삼 유럽사회의 근간이 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떠올렸다.

이번 사태가 사회 지도층 인사들의 도덕성을 다시 한 번 환기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불행하게도 아직도 우리나라의 부패인식지수는 경제규모와 민주주의의 성숙도에 비해 매우 낮은 수준에 머물고 있다. 사회 지도층부터 바로 서야 한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것은 동서고금을 통한 진리 아니던가. 소위 높은 자리에 오른 출세한 어른들은 적어도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본받고 따를 수 있는 도덕성을 지녀야 한다. 열심히 노력해서 나도 저 자리에 오르려면 어떻게든 청렴하고 깨끗하게 살아야 한다는 다짐을 심어줄 수 있는 진정한 리더들이 아쉬운 때다.

최 중 근(탑정형외과연합의원 원장)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