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의술, 예술과 만나다… 윤성도·강민구·공정욱

미술, 시와 수필, 음악 등 다방면에 출중한 재능을 드러내고 있는 동산병원 윤성도 석좌교수.
미술, 시와 수필, 음악 등 다방면에 출중한 재능을 드러내고 있는 동산병원 윤성도 석좌교수.
연극 제작자로 지역 연극계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 있는 공정욱치과의원 공정욱 원장.
연극 제작자로 지역 연극계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 있는 공정욱치과의원 공정욱 원장.
KMG내과 강민구 원장은 예술을 사랑해 자신의 진료공간에서 벌써 30차례 공연을 가졌다.
KMG내과 강민구 원장은 예술을 사랑해 자신의 진료공간에서 벌써 30차례 공연을 가졌다.

의술과 예술.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조합이지만 의외로 교묘하게 얽혀드는 측면이 있다. 의사란 직업은 항상 생명과 건강을 다루고 그 의미에 대해 생각해야 하는 특성상 인격적 수양과 철학을 갖추는 것은 필수요소다. 거기에 근간을 형성해주는 것이 바로 예술이 되는 것이다. 생사의 경계를 넘나들고 하루종일 진료실에서 몸이 아픈 이들을 어루만져 줘야 하는 직업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데도 제격이다. 그렇다 보니 의사들 중에서는 문화예술 분야에 있어 전문가 뺨칠 정도의 소양을 갖춘 이들이 꽤 많다. 이들은 '예술'과 '삶'은 분리할 수 없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윤성도(65) 계명대 동산병원 석좌교수

윤 교수는 미술과 음악, 글쓰기 등 다방면에 고루 두각을 드러내는 재주꾼이다. 그림만 해도 벌써 3번의 개인전을 연 데 이어 이달 23일부터 한 달간 동산병원 1층 복도에서 4번째 개인전을 열 정도로 수준급의 실력을 갖췄다. 윤 교수는 "이번 전시회는 병원장의 요청이 있었다"며 "지금껏 그린 그림들을 집에 쌓아둘 것이 아니라 병원에 기증해 달라고 해서 뜻하지 않게 전시회를 열 기회가 생겼는데, 38년을 근무해 온 병원에서 개인전을 갖는다는 것이 정말 뜻깊고 감사한 일"이라고 했다. 그는 지난여름 정년퇴임을 했지만 병원의 요청에 따라 현재 국제진료센터 의사로 재직 중이다.

여기에다 그는 4권의 시집과 3권의 수필집을 낸 글쟁이기도 하다. 가장 최근의 작품집이 4번째 펴낸 시집. 지난여름, 정년퇴임 기념으로 시집을 출간했다.

오페라 클래식 등 음악에 있어서도 칼럼리스트로 활동할 정도로 전문가 수준을 갖췄다. 한때는 매일신문에 오페라 이야기를 연재했고, 시립교향악단이나 유명 오케스트라 공연이 있을 때면 꼭 찾아 감상하고 리뷰를 언론사에 보내기도 한다.

윤 교수는 중'고등학생 때 미술반 활동을 화면서 미대 진학을 꿈꿀 정도로 예술에 대한 갈증이 깊었다. 하지만 부모님 성화에 못이겨 의대에 진학하면서 평생 산부인과 의사로 재직했다. 그는 "그때 못다 이룬 꿈이 남아 1979년 전문의 자격증을 따면서 생활이 안정된 후에는 다시 붓을 들었고 10여년 전만 해도 새벽 2, 3시까지 그림을 그릴 정도로 깊이 몰두했다"고 했다.

음악은 오랜 세월 함께한 친구와 같다. 중학교 2학년 때 음악선생님이 수업시간에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 등 다양한 클래식을 들려준 게 귀에 익으면서 자연스럽게 클래식을 즐겨 듣게 된 것. 윤 교수는 "대학시절 대구극장 인근에 있었던 음악카페 '하이마트'는 친구들 아지트로 사용될 정도로 음악에도 애착이 깊었다"고 했다.

이런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그의 예술 활동에 대해 본인은 "밀가루 반죽이 있으면 그것을 떼내 수제비도 만들고, 칼국수도 만들고, 만두피도 만들 수 있는 것처럼 예술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있다면 표현되는 방식에 차이가 있을 뿐 그 근본 내용은 같은 것 아니겠냐"고 했다.

그는 "예술이란 예술가만 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 즐길 수 있는 도구"라며 "어릴 때부터 예술 교육을 받으면 다양한 생각의 도구를 가질 수 있게 돼 삶의 깊이가 한층 깊어지는 매력이 있다"고 했다. 이런 이유에서 윤 교수는 계명대 의대에서 '의학과 예술'이라는 새로운 과목을 개설해 학생들의 인격적 깊이를 더하는데도 힘을 보태고 있다. 그는 "요즘 학생들은 오페라와 뮤지컬도 구분하지 못할 정도의 수준"이라며 "이들에게 평생 마음을 다스리는 휴식 같은 고향 하나를 만들어주는 것과 함께 예술을 통해 닦은 마음이 진료하는 동안 환자들 한 명 한 명에게 에너지로 전달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라고 밝혔다.

◆공정욱(51) 공정욱치과 원장

공 원장은 인생의 상당 부분을 연극에 올인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인물이다. 지금도 초이스 씨어터의 제작자로 힘든 연극계에 든든한 뒷받침이 되어주고 있다.

그가 연극에 눈을 뜬 것은 고등학교 시절. 그때는 고작 해야 친구들끼리 친목동아리를 만들어 20, 30분짜리 콩트를 만들어보는 정도였다. 그리고 대학 진학 후 본격적으로 연극반 활동을 하면서 깊숙이 발을 들여놓고 말았다. 공 원장은 "지금도 당시 함께 연극을 했던 친구들이 문화계 곳곳에 포진해 있다"며 "졸업 후에도 10여년을 후배들 무대 조명을 봐 줄 정도로 열성을 쏟았는데 1998년 무렵 연극반 맥이 끊어진 것이 못내 가슴 아프다"고 했다.

그러던 그가 2005년 드디어 '사건'을 만들었다. 연극을 좋아하고 즐기는 친구들과 모여 '극단 하나라도 제대로 된 공연을 할 수 있도록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보자'며 술잔을 기울이다 '이럴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극장을 만들자'고 논의가 급진전돼 버린 것. 그 자리에서 공 원장은 지인들에게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고 그날 밤 1천만원의 후원금이 마련됐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극단 마카'의 공연장이었다. 공연장이 부족하다 보니 몇 달을 연습해 고작 며칠 무대에 올리는 극단의 현실이 안타까웠다. 공 원장은 "사실 출발은 후원자였지만 이것저것 속속들이 관여를 하다보니 그 거리를 유지하기가 쉽잖았고, 결국 제작자의 역할을 맞게 됐다"고 했다. 그렇게 연습실 겸 공연장을 꾸미고 처음 무대에 올린 작품이 '해가지고 달이뜨고'라는 제목의 연극이었는데 한 달 동안 장기 공연을 하는 동안 객석이 꽉 찼고, 이후 앙코르 공연으로 다시 한 달 동안 장기공연을 이어갈 정도로 지역 연극계에 신선한 돌풍을 일으켰다.

지금 그는 연말을 앞두고 한창 치과의사회 송년회 공연을 총괄기획'연출 하느라 분주한 날을 보내고 있다. 치과의사회 회원들 가운데서는 노래나 악기, 댄스 등에 다양한 재능을 가진 이들이 직접 무대를 꾸미도록 하는 것. 대신 그는 이 아마추어들의 공연에 최고의 스태프를 꾸렸다. 황원구 수성오케스트라 지휘자와 허브로드 작곡가인 최성철 씨 등 프로급 스태프들이 공연을 엮어내도록 한 것. 공 원장이 이렇게 사람들에게 직접 무대를 경험하게 하는데 공을 들이는 것은 단순 관객이 아니라 문화계를 든든하게 뒷받침해주는 '울트라 마니아'를 더 많이 키워내기 위함이다. 공 원장은 "프로급 스태프들과 함께 공연이 만들어지는 전 과정을 함께 경험하게 함으로써 앞으로 공연을 볼 때 한층 넓은 시야를 갖도록 하는 효과가 있는 것은 물론이고, 문화를 단순 소비하는 데서 한발 더 나아가 문화계를 지지해주는 후원자로 남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밝혔다. 그는 이렇게 마니아를 키워내는 것이 '문화 생산자'의 본분이라고 했다.

중년이지만 아직 청년의 '열정'을 가진 그는 또 다른 꿈을 꾼다. 이렇게 무대를 경험해보고 남몰래 자신의 실력을 키워온 이들이 함께 모여 의료봉사와 문화봉사를 결합한 새로운 형태의 '감성 교류'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공 원장은 "치아를 치료해주는 봉사도 좋지만 마음을 즐겁게 해주는 봉사도 매력있지 않느냐"며 "공연을 통해 즐거움을 주고 그 수익금으로 또 다른 봉사를 할 수 있는 의사들의 모임을 만든다면 정말 행복할 것"이라고 했다.

◆강민구(54) KMG내과 원장

중학생 시절 강 원장은 '라디오 키드'였다. 음반이라는 것을 구하기는 정말 어려웠던 시절, 그 무렵 개국한 FM방송은 정말 들어도 들어도 질리지 않는 소리의 보고였다. 강 원장은 "우수한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조건으로 아버지께 라디오를 선물 받았고, 의대 들어가는 조건으로 전축을 요구했을 정도로 음악에 푹 빠져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음악적 재능은 없었다. 그는 "정말 조금의 재능이라도 엿보였다면 당장 진로를 바꿨겠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노래도 잘못하는데다 악기 하나 다룰 줄 아는 게 없다"며 웃었다. 대신 그는 재능을 가진 이들에게 사람들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공연의 장을 제공하자고 마음을 먹었다.

2004년 대구 남구 대명동에서 개원하면서 정원에 있는 커다란 태산목을 본래의 상태로 보존하기 위해 건물 한가운데를 비워 마당을 만든 것이 계기가 돼'공연장'으로 사용되게 된 것이다. 강 원장은 "처음부터 공연을 할 의도가 있어서 건물을 이렇게 지은 것은 아니었지만, 평소 친분이 있던 음악하는 친구들이 와서 노래를 불러보더니 울림이 정말 좋아 공연을 하면 좋겠다고 하는 말에서 용기를 얻었다"고 했다.

그리고 현재 계명아트센터 김완준 관장이 개업 선물로 마련해 준 첫 번째 콘서트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25번의 음악회를 열었다. 비공식 공연까지 합치면 30회가 넘는다. 이 밖에도 진료 공간을 활용해 다양한 전시회와 패션쇼까지 펼쳐보이고 있다. 그는 지금까지 가장 감동적이었던 기억 중 하나로 '프리뮤직'을 하는 미연'박재천 씨의 공연을 꼽았다. 당시 뒤풀이 장소에 주인공인 박재천 씨가 한참 늦게 나타났는데 그 이유가 공연에 너무 감동을 받은 아주머니 두 분과 대화를 나누다 늦었다는 것. 강 원장은 "두 분이 공연을 보다 평생 가슴 속에 쌓였던 울분이 터져나가며 눈물이 흘러내려 주체를 할 수 없었다고 하더라"며 "단 한사람에게라도 그런 공연을 선사할 수 있어 기분좋고 감사하다"고 했다.

그에게 예술은 '평생의 동경'이다. 그러면서 생활의 일부다. 사람들과 같이 숨 쉬고 교류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 나이가 드니 왜 옛날 그리스'로마에서 수사학이나 철학을 그토록 중시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며 "지적'감정적으로 풍부한 사회가 됐으면 하는 바람에서 내가 우리 사회에 일조하는 방법은 예술가와 관객이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편안하게 소통하고, 누구나 벽없이 문화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을 열어주는 것"이라고 했다.

한윤조기자 cgdream@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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