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 존재하는 수많은 문자 가운데 만든 사람과 만든 원리, 반포 날짜를 알 수 있는 것은 한글뿐이다. 이런 연유로 한글은 가장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문자로 평가받고 있다. 한글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릴 수 있었던 이유는 한글을 만든 동기부터 제작 원리, 음가, 운용 방법 등을 체계적으로 설명해 놓은 훈민정음 해례본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세계적으로 창제된 문자가 거의 없는 데다 문자를 만든 사람이 창제 원리를 자세히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 훈민정음 해례본은 전무후무한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꼽히고 있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간송본과 상주본이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상주본은 실체는 확인되었지만 행방은 묘연한 상태다. 상주본을 훔친 혐의로 기소된 배모(49) 씨가 입을 다물고 있기 때문이다. 가치를 측정하기 어려운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 실종 사건을 정리했다.
◆사건 전말
한동안 훈민정음 해례본은 1940년 안동에서 발견되어 서울 간송미술관에 보관되어 있는 간송본(국보 제70호)이 유일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다 2008년 7월 상주본의 존재가 세상에 드러났다. 당시 배 씨가 문화재청 홈페이지에 '집에서 고서적 한 권이 나왔는데 국보로 지정받고 싶다'는 글을 올린 것이 발단이 됐다. 진품 여부에 학계뿐 아니라 국민들의 관심이 쏠리자 한국국학진흥원이 감정을 벌여 진짜 해례본임을 확인했다.
그런데 얼마 후 상주에서 골동품점을 운영하는 조모(67) 씨가 "자신의 골동품점에서 배 씨가 30만원을 주고 고서적 두 상자를 사가면서 상주본을 몰래 넣어갔다"며 소유권을 주장하고 나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됐다. 상주본을 둘러싼 소유권 다툼은 소송으로 이어졌고, 지난해 6월 대법원이 물품 인도 청구소송에서 배 씨에게 상주본을 반환하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상황은 종결되는 듯했다. 하지만 배 씨는 상주본의 인도를 거부했다. 문화재보호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배 씨는 최근 대구지법 상주지원 형사합의부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재판 결과에 불복해 항소를 한 상태며 상주본의 행방에 대해서는 여전히 함구하고 있다. 검찰과 법원은 배 씨로부터 상주본을 되찾기 위해 119구조대까지 동원해 배 씨 집을 압수수색했지만 상주본을 찾는 데 실패했다.
미궁에 빠진 상주본의 행방을 두고 설이 분분하다. 배 씨가 국내에 숨겨 놓았다는 설과 이미 국외로 반출시켰다는 설 등이 난무하고 있다. 이에 대해 문화재청은 상주본이 국내에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배 씨의 성격과 주변 관련자를 대상으로 한 탐문 결과를 종합해 볼 때 배 씨가 거주지 주변에 상주본을 은닉시켜 놓았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 이에 따라 문화재청은 해외 밀반출을 막기 위해 공항'항만에 상주본 사진 자료를 보내는 등의 조치를 취해 놓은 상태다.
◆상주본의 가치
상주본은 간송본보다 더 가치가 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간송본보다 보존 상태가 양호하고 16세기 표제와 주석이 첨부되어 있어 학술적 가치도 높기 때문. 지금까지 상주본을 직접 본 사람은 조 씨와 배 씨, 임노직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문화박물관장 등 3명뿐이다. 특히 임 관장은 상주본을 육안으로 직접 확인한 유일한 전문가다. 배 씨가 감정을 위해 딱 한번 상주본을 공개한 뒤 바로 숨겨버렸기 때문이다. 임 관장은 상주본을 최초로 감정한 후 가진 인터뷰에서 "종이 재질이나 표기법 등을 봤을 때 간송본과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해례본이 확실했다. 내용도 간송본과 같았으며 보관 상태는 훨씬 좋았다. 임진왜란 이전의 한글 표기법으로 아주 세세한 주석이 달려 있고 한글 창제 과정에 대한 비판적 내용도 실려 있어 당시 사람들이 훈민정음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었는지를 연구할 수 있는 귀중한 사료"라고 평가했다.
또 고서적 감정의 권위자인 남권희 경북대 문헌정보학과 교수도 "임 관장이 감정할 당시 찍어 두었던 영상물을 통해 상주본을 본 결과, 발음에 관해 붓으로 글씨를 써놓는 등 공부한 흔적이 있었다. 훈민정음이 창제된 이후 어떻게 보급됐고 어떻게 학습되었는지 등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문화재"라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상주본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면 얼마나 될까. 문화재청 관계자는 "상주본은 가격을 산정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가치를 갖고 있다. 굳이 따진다면 1조원 이상 될 것"이라고 말했다. 남 교수도 "유물로서의 가치뿐 아니라 산업적'문화적 가치까지 합치면 1조원의 가치는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1조원은 정확히 산출되는 금액이 아니라 상주본이 가치를 매길 수 없을 만큼 소중한 문화재라는 것을 의미하는 상징적인 숫자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박민철 한국고서협회 회장은 "1조원은 너무 많다. 고서나 고미술품의 가격은 실거래 기준이 되는 현실가, 상징적으로 붙이는 상징가가 있다. 1조원이란 가격은 훈민정음이 갖는 특수한 가치를 인정해 상징적으로 붙인 상징가다. 객관적으로 판단하면 300억원 정도 될 것으로 생각된다"고 말했다.
◆문화재청 입장
상주본이 자취를 감추면서 입장이 난감해진 것은 문화재청이다. 간행된 지 500년이 넘은 책이라 하루빨리 전문적인 보존 작업을 하지 않으면 크게 훼손될 우려가 있지만 현재로서는 상주본을 찾을 가능성이 요원해 보이기 때문이다. 특히 배 씨가 상주본을 낱장으로 분리한 뒤 비닐봉투에 싸서 은닉했을 것으로 추정됨에 따라 더 이상 훼손되기 전에 빨리 상주본을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훼손이 우려돼 회수가 시급하다. 상주본을 안전하게 확보하기 위해 사법당국과 긴밀한 협조 체제를 유지하며 행방을 추적 중이다"고 밝혔다. 또 "상주본의 행방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인 배 씨가 상주본을 찾는 키를 쥐고 있는 만큼 배 씨를 대상으로 반환 설득 작업도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한편 문화재청은 상주본을 찾으면 안전한 보존과 활용을 위해 조 씨에게 국가 기증을 유도한다는 방침이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만일 상주본이 국가에 기증된다면 관리기관을 정하고 국보 지정 등의 절차를 밟을 예정이다"고 말했다.
◆시민들 반응
상주본의 행방이 미궁 속으로 빠져들자 국보급 문화재를 영영 찾을 수 없을 것이라는 우려감이 높아지고 있다. 특히 인신 구속을 각오하면서 상주본의 소재를 숨기고 있는 배 씨에 대해서는 비난의 목소리가 거세지고 있다. 한 문화계 인사는 "이번 사건은 저급한 문화의식을 보여주는 부끄러운 일이다. 세종대왕이 반포한 훈민정음 해설서를 한낱 개인이 빼돌려 숨긴 것은 문화재가 민족의 자산임을 망각한 행동이다. 상주본의 훼손이 불 보듯 뻔한데 공권력이 미치지 못하는 것이 개탄스럽다"고 말했다.
직장인 박성철(44) 씨는 "배 씨가 입을 다물고 있는 의도가 괘씸하다. 10년 정도 징역 살고 나와서 비싼 가격에 상주본을 밀매매해 큰돈을 벌려는 수작으로 보인다. 상주본이 가치를 매길 수 없는 국보급 문화재이고 고의적으로 행방을 말하지 않는 점을 감안하면 징역 몇 년 살고 끝낼 문제가 아니다. 형량을 대폭 늘려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 누리꾼은 "10년 지나 면죄부를 얻은 배 씨가 일본이나 중국에 상주본을 팔아넘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혈압이 치솟는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고문기술자를 초빙해 고문을 하면 거뜬히 상주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경달기자 sara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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