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곰보빵

누군가 내게 빵 하나를 건넨다. 곰보빵이다. 쉬이 베물지 못하고 한참 동안 바라만 본다. 기억의 한 편에 묻어두었던 슬픔 하나가 돋보기를 들이댄 듯 선명하게 드러난다.

지독히 추웠던 25년 전 겨울, 나는 강원도 어느 신병훈련소에 입소를 했다. 아무리 먹어도 허기졌던 신병훈련 1주차가 지날 무렵, 진우를 만났다. 그와 나는 어려서부터 한동네에서 자란 친구였다. 군대에서 연줄을 만난 것이다. 진우는 훈련소의 취사담당 이등병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훈련소에서 이등병 연줄이 어딘가. 먼저 자대 배치를 받은 진우가 하늘처럼 높아 보였다.

어느 날, 식기에서 잔반을 털고 있는데 진우가 취사장 뒤로 몰래 불렀다. 부스럭거리며 주머니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내 손에 쥐여주었다. '곰보빵'이었다. 훈련소에서 맛없는 것이 있을까. "이거 어디서 먹어?"라는 내 질문에 "화장실"하며 진우가 짧게 말하고 사라졌다. 숨어 먹기엔 화장실이 최적의 장소란 것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다. 훈련소에서 유일하게 자유로운 곳은 화장실이었다. 밤을 노렸다. 소리라도 새어 나갈세라 손에 땀을 쥔 채 빵 봉지를 뜯었다. 가슴에 품고 품어 짓눌려 있었다. 빵은 뭉개져도 빵이다. 코끝으로 전해지는 고소함은 재래식 화장실의 곰삭아 구린 냄새를 압도하고도 남았다. 숨을 죽이고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때 그 순간의 맛과 느낌을 이 지면에다 담아낼 어휘의 빈약함이 섧다. 그 후로 진우는 이틀이 멀다 하고 곰보빵을 건네주었다. 혹독한 훈련기간 동안 내 볼살은 토실토실 돋아 올랐다.

훈련을 마치고 철책으로 자대 배치를 받았다. 그렇게 진우와 헤어졌다. 제대를 하고 제일 먼저 진우의 고향집을 찾았다. 훈련소의 밤을 설레게 했던 진우, 낯선 곳에 적응 못 해 쩔쩔매는 나를 곰보빵으로 달래주었던 진우, 그를 놀래주려고 곰보빵을 한아름 샀다. 대문을 열고 진우를 불렀다. "진우야." 평상 위에 넋을 놓고 있던 진우의 어머니가 못내 입을 열었다. "진우, 죽었어. 군대서." 이 짧은 한마디를 남기고 방으로 들어가셨다. 어머니가 남긴 비보는 품에 안은 곰보빵과 함께 발밑으로 뚝뚝 힘없이 떨어졌다.

올해도 현충일이 지났다. 이맘때가 되면 진우가 사무치게 그립다. 이렇게 넋두리라도 하는 것은 새벽이슬 같은 청춘의 봄을 나라에 바쳤던 이 땅의 수많은 진우들, 그 숭고한 흔적이라도 기리고 싶어서다.

손에 든 빵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날 이후로 하나를 다 먹어본 적이 없다. 큰 숨 한 번 쉬고 한 입 베어 물었다. 목구멍에서 넘어가지 않는다. 진우는 그렇게 평생을 내 안에서 곰보빵으로 산다. 덕지덕지 진한 그리움으로. 펄럭이는 6월의 태극기 위에 진우가 아른거린다.

이 상 렬 수필가'목사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