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5년 3월 4일. 마침내 사명대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 강화회담을 갖는다. 사명이 조선을 떠난 지 반 년을 넘긴 시점이다. 이때 일본의 왕은 아무 실권이 없는 허수아비와 같은 존재였다. 때문에 회담은 일왕이 아니라 도쿠가와의 근거지인 후시미죠(伏見城)에서 이루어졌다. 사명과 도쿠가와의 회담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다만 단편적으로 기술된 내용을 정리하면 도쿠가와가 그해 1월 9일 자신의 세력 거점인 에도(현 도쿄)를 출발, 2월 19일 8만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아들 히데타다(秀忠)와 함께 교토에 들어왔다. 도쿠가와는 회담을 위해 교토에 머물며 기다리던 사명을 비롯, 사절단 일행에게 이 장면을 참관케 했다. 사명은 도쿠가와의 이런 행동이 자신의 힘을 과시해 사명 일행에게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위협을 주기 위한 행동이라고 평가했다. 사명은 도쿠가와의 의도된 행동의 의미를 간파하고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회담에 임했던 것이다.
◆사명, 도쿠가와와 강화회담으로 평화의 길 열어
도쿠가와는 사명과의 회담에서 조선과의 강화를 희망한다. 사명은 회담에서 "두 나라의 백성들이 오랫동안 도탄에 빠져 있음으로 그들을 구제하러 왔노라"고 했다. 이에 도쿠가와는 "임진왜란 때 나는 관동(關東'지금의 도쿄 일대)에 있었고 군대 일에는 한 번도 관여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자신의 군대를 조선에 파견하지 않았음으로 전쟁과 자신은 무관하다는 뜻이다. 또한 전쟁을 일으킬 의사가 없으니 화호(和好)하기를 청한다. 그러나 도쿠가와는 조선에 직접 출병을 하지는 않았지만 나고야성(名護屋城)에 대기하고 있었다. 또 도요토미와 의형제로서 도요토미 정권의 한 축을 담당했으니 그가 전쟁의 책임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이는 마치 요즘 위안부'독도 문제를 대하는 일본의 태도와 닮았다.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책임을 지지 않으려 한다. 위안부 강제 동원에 대한 직접 증거가 없다며 억지를 부리는 것과 같다. 역사를 왜곡하려는 얄팍한 섬나라의 속물 근성인가. 하지만 사명은 이를 크게 문제삼지 않았다. 전쟁으로 황폐해진 조선의 부흥을 위해서는 일본과 긴장 관계를 해소하고 국교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가 회담을 주도적으로 이끌 수 있었던 것도 이런 현실적인 판단과 담대함 때문일 것이다.
사명은 먼저 일본이 전쟁의 잘못을 인정하고 이에 대한 사죄와 보상을 해야 하며, 잘못도 없이 끌려온 포로들을 송환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사명은 도쿠가와로부터 포로 송환을 약속받고 강화회담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2년 뒤(1607년) 조선은 '회답 겸 쇄환사'라는 사절단을 일본에 파견한다. 이후 1811년까지 12차례 조선통신사가 파견된다. 사명이 조선통신사 파견의 초석을 놓은 셈이다. 이후 1875년 운요호사건 때까지 조선과 일본은 평화를 유지한다. 사명이 노구를 이끌고 열어놓은 조선'일본 간 뱃길이 두 나라의 평화를 만든 것이다.
◆권력 무상함을 보여주는 후시미죠(伏見城).
사명과 도쿠가와가 회담한 후시미죠(伏見城)를 찾았다. 성은 교토 도심에서 남쪽에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멀리서는 웅장하게 보이던 성이 가까이 다가가니 적막하다. 쇼군의 근거지였던 곳인데 잡초가 무성한 채 방치돼 있다. 도쿠가와 부자는 당시 사명과의 회담에 앞서 군대를 도열시키면서 위용을 뽐냈다고 전하나 지금 일행을 맞는 것은 잡초 뿐이다.
후시미죠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죽음을 맞이한 성이다. 히데요시가 명나라와의 평화교섭 실패 후 정유재란(1597년)을 일으켰으나 고전을 면치 못하다 이곳에서 병사한다. 도쿠가와가 쇼군으로 등극한 뒤 후시미죠에 들어와 권력을 잡지만 도요토미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성을 철저히 해체 시킨다. 이때 반출된 목재'돌 등은 지금도 인근 신사 등에 남아 있다. 현재 후시미죠는 성터만 남아 있는 것을 40년 전 콘크리트 건물로 지어 개방했는데 찾는 발길이 줄어들자 폐쇄했다고 한다. 무더위를 식혀주는 한 줄기 바람이 역사의 흥망성쇠와 무상함을 말해주는 듯하다.
사명과 도쿠가와의 강화회담은 순조롭게 진행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사명의 뛰어난 지략의 승리다. 사명은 회담을 앞두고 열린 2월 28일 풍광사(豊光寺)의 녹원원(鹿苑院'지금 金閣寺)에서 열린 법회에서 도쿠가와의 심복들을 설득했다. 그는 도쿠가와의 정치외교 고문역을 맡고 있는 쇼코쿠지(上國寺) 주지 사이쇼 죠타이(西笑承兌) 등 참석자들에게 불교의 자비정신으로 억울하게 끌려온 조선 포로의 송환 문제를 거론하며 설득한 것으로 보인다. 이날 법회 모습을 기록한 '녹원일록'(鹿苑日錄)에는 "사명이 당지(唐紙)'당선(唐扇)'인삼 등 예물을 지참했고 연회가 있은 후 성대한 시회가 열렸다"고 했다. 도쿠가와의 측근들을 추켜세워 회담을 위해 우호적인 분위기를 조성한 것이다. 사명은 특히 조선 백성들의 송환 문제를 중요하게 여긴 듯하다. 녹원원 모임에 죠타이 등 일본 승려들과 주고받은 시'문은 '사명집'에 실려 있다.
사명은 성공적인 회담 후 교토에서 20여일을 머물며 봄 경치를 감상하며 모처럼 여유로운 시간을 즐긴다. 그는 오쯔(大津)시 히에산(比叡山)의 호수 주변 죽림원(竹林院)을 찾아 벽에다 시 '재상야수죽림원벽상'(在上野守竹林院壁上)을 남겼다. 또한 청년 주자학자이며 도쿠가와의 책사인 하야시 라잔(林羅山)과 필담으로 교류하기도 했다.
◆귀국 길에 조선인 포로들도 데려와
사명은 봄빛이 무르익은 3월 27일 교토를 떠나 대마도로 향한다. 사명 일행의 발걸음이 가벼워서인지 갈 때는 한 달 정도 걸린 뱃길이 돌아올 때는 20일로 줄어든다. 대마도에 도착한 사명은 대마도주 소 다케요시(宗義智)의 도움을 받아 여러 지역에 흩어져 있던 조선 포로들을 불러 모았다. 이들에게 필요한 식량 등을 조달받아 드디어 4월 말 대마도를 출발해 부산으로 향한다. 1년 전 부산포를 출발할 때는 범선 8척에 불과했으나 돌아올 때는 48척의 크고 작은 배에 포로로 끌려간 1천390명의 조선 백성을 나눠 태워 돌아온다. 그가 부산에 도착한 시기는 5월 5일로 알려져 있다. 사명이 구국의 일념으로 부산을 떠난 지 9개월 만에 그리운 고국 땅을 밟은 것이다. 해인사 홍제암의 '석장비문'(石藏碑文)에는 이후 모두 3천500명의 조선인 포로가 돌아왔다고 기록돼 있다.
사명이 일본에서 남긴 시'문과 일기, 상소문 등을 모아 수록한 '분충서난록'을 편집한 신유한(申維翰'1681~1752)은 "죽음을 무릅쓰고 전쟁 끝에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가 교룡이나 독사 같은 왜인들과 더불어 목을 쓰다듬고 즐겁게 이야기하였으니 담이 크고 마음이 트인 사람이 아니면 어찌 능히 이 일을 감당하겠는가! 생각만 해도 서늘하다"고 인물됨을 평했다.
◆조선 백성들의 원혼이 깃든 귀무덤(耳塚)
교토에서 사명의 발자취를 더듬다 조선인 귀(코)무덤(耳塚)을 찾았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침략한 왜군은 전공(戰功)의 표식으로 무겁고 부피가 큰 머리를 베는 대신에 조선 군민(軍民)의 코와 귀를 베어 소금에 절여 일본으로 가지고 돌아갔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리품으로 가져 온 조선인의 귀와 코를 이곳에 매장토록 했다. 왜군의 전리품으로 희생된 조선인의 수는 12만6천여 명에 달한다고 한다. 그래서 임진왜란 후 조선에는 코나 귀가 없는 백성들이 자주 눈에 띄었다고 한다. 싸움에 참가한 관군'의병 등은 어쩔 수 없다고 하자. 그러나 아무리 전쟁 중이지만 선량한 백성들의 코와 귀를 베는 것은 너무 야만적이다. 이들의 야만성은 300년 뒤인 20세기 초 아시아 침략 전쟁을 불러 일으켜 동양의 평화를 무참히 유린하고 무고한 양민을 학살하고 부녀자들을 위안부로 끌고가 성노예로 만들었다. 귀 무덤을 보면서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민다. 인류 역사상 찾아 보기 힘든 이런 야만의 나라를 정말 이웃이라 불러도 될까? 귀 무덤 위에는 오륜석탑(五輪塔)이 세워져 있다. 희생된 조선인의 원혼을 누르기 위해 조성된 것으로 알려졌다. 역사는 되풀이 된다. 최근 위안부'독도 문제 등을 둘러싼 일본의 행태를 보면서 어줍잖은 대응으로 우(愚)를 범하면 후일 역사의 웃음거리가 된다는 것을 세겨야 할 것이다.
일본 쿄토에서=글'박용우기자 ywpark@msnet.co.kr 사진'서하복작가 texcaf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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