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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사랑] 신장이식 받았지만 병원비가 걱정인 박동희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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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희망을 봤어요…후회없이 살고 싶어요"

만성신부전증에 시달리다 신장이식 수술을 받은 박동희(51) 씨. 생명은 건졌지만, 병원비 걱정에다 17년간 혈액 투석 후유증으로 혈관이 부어 올라 고통스러워 하고 있다.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만성신부전증에 시달리다 신장이식 수술을 받은 박동희(51) 씨. 생명은 건졌지만, 병원비 걱정에다 17년간 혈액 투석 후유증으로 혈관이 부어 올라 고통스러워 하고 있다.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다시 삶의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내일 죽더라도 후회 없이 살고 싶어요."

7일 오후 대구 중구 동산의료원 장기이식병동에서 만난 박동희(51'대구 달서구 상인동) 씨가 장기이식을 받은 직후 한 말이다. 박 씨는 13년 전 신장이식을 받을 기회가 있었지만, 돈이 없어 포기하고서 살아갈 희망을 찾지 못한 터라 감격이 더했다. "저녁에 잠들 때쯤이면 '다음 날 깨지 말고 저세상으로 가버렸으면'하고 생각했다"라고 할 정도로 하루하루를 고통 속에서 보내던 박 씨에게 신장이식은 삶의 한 줄기 빛이었다.

◆지루한 병마 끝에 만난 희망

박 씨 병력의 시작은 1992년부터였다. 갑자기 폐결핵에 걸렸던 박 씨는 보건소에서 약을 지어 먹었지만 한 달 만에 그만뒀다. 당시 일하던 곳에서 월급을 제때 받지 못해 더는 약값을 마련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일을 그만둘 수 없었던 박 씨는 아픈 몸을 이끌고 계속 일을 했다. 그렇게 버티던 중 다리가 부어 걸을 수조차 힘든 지경에 이르게 됐고, 결국 병원에서 만성신부전증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의사 선생님 말로는 이 병을 고치려면 신장이식밖에 방법이 없대요. 신장 이식자가 당장 나타나지도 않거니와 나타나더라도 이식 비용을 어떻게 마련해야 할지도 막막하더군요."

이후 고통스러운 치료의 나날이 시작됐다. 일주일에 세 번씩 혈액 투석을 받았고, 투석치료를 받고 나면 혈관 주변에 뻐근한 통증이 계속됐다. 혈액 투석의 부작용으로 주삿바늘을 찔렀던 혈관이 늘어나고 부풀어 박 씨의 왼쪽 팔은 마치 등나무 줄기와 같은 혹이 팔꿈치부터 어깨 위까지 나 있다. 박 씨는 "주삿바늘로 찌른 부위로 피가 새어나올 때가 있어 투석 받은 다음 날 이부자리를 보면 피투성이가 돼 있다"고 말했다.

치료 비용도 만만치 않다. 투석을 받을 때마다 7, 8만원씩 비용이 드는 데다 약값까지 합하면 한 번 치료를 받을 때마다 30만원 정도가 필요하다. 박 씨는 지금까지 모아둔 돈을 모두 치료비에 쏟아부어야 했다.

그러던 이달 1일 새벽, 박 씨는 동산의료원으로부터 "이식받을 신장이 확보됐으니 신장 이식을 받는 것이 어떠냐"는 전화를 받았다. 지난 2000년 신장이식 기회를 돈 때문에 포기했던 기억이 떠오른 박 씨는 이번에도 돈 때문에 거절하려 했지만, 병원에서 "일단 사는 게 먼저 아니겠느냐"며 수술 받기를 권유했고 박 씨는 병원의 얘기에 따랐다.

박 씨는 "일단 저질러보자는 병원의 말에 겁이 나기도 했지만 이게 마지막일 수 있다는 생각에 응했다"며 "지금까지 희망이라고는 없는 삶이었는데 죽으라는 법은 없나 봅니다."

◆불우했던 가정에서 탈출했지만…

박 씨는 충북 청주시에서 3남 1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청주에서 대구에 정착하기까지 박 씨에게는 많은 일이 있었다. 그 중 첫 번째는 박 씨가 15살 때 어머니가 병으로 돌아가신 것이었다. 이후 새어머니를 맞았고 가족이 부산으로 이사했다. 박 씨는 "이때부터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박 씨와 형제들은 새어머니와의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 늘 새어머니와 마주하면 싸우는 게 일이었다. 마찰이 심해지면서 박 씨는 중대한 결심을 한다.

"도저히 집에 있을 수 없었어요. 계속 싸우게 되고 이 때문에 형제간의 관계도 멀어졌어요. 결국, 집을 나가기로 하고 서울에 계신 작은아버지 댁으로 갔죠."

박 씨는 채소 장사를 하는 작은아버지를 도우면서 객지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작은아버지의 채소 장사도 점점 어려워졌고 2년 뒤 결국 작은아버지는 청주로 돌아가 농사를 짓겠다고 말했다. 청주로 돌아가기 싫었던 박 씨는 다시 작은아버지 집을 나와 중국집 배달부로 취직했는데, 어느 날 대구에서 일하던 친구가 박 씨를 찾아와 "대구에 일자리가 있으니 내려오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박 씨는 그 길로 대구로 내려가 친구가 일하던 양은냄비 생산공장에 취직했다.

"공장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어요. 결국, 공장을 나와 돈이 되는 일이면 닥치는 대로 했어요. 공사장 일은 기본이고 연탄 배달, 구두 수선공, 과일 장사 등 안 해본 게 없어요. 결혼은 할 생각도 못했어요. 어느 여자가 나 같은 남자에게 시집 올 생각을 하겠습니까."

가출 후 가족과의 연락도 끊겼다. 30년 넘게 연락 없이 살다가 2년 전인 2011년 친구들을 통해 가족과 연락이 닿았다. 박 씨가 가출한 뒤 가족은 뿔뿔이 흩어져 있었다. 박 씨와 형제들은 지금도 서로 연락이 뜸한 상태다. 박 씨는 "서로 힘들게 살아와서인지 연락하기가 참 미안하더라"며 "내가 신장이식 받을 때 남동생이 잠깐 왔다 갔다는 이야기는 들었다"고 했다.

◆"다시 행복이 올까요?"

신장이식으로 다시 삶의 희망을 찾게 된 박 씨에게 한 가지 고민이 생겼다. 병원비다. 13년 전에도 병원비 때문에 신장이식 수술을 포기했던 박 씨는 이번엔 신장이식을 받기는 했지만, 병원비를 해결할 방법이 없는 것. 기초생활수급권자인 박 씨는 수술비와 이식비용 등을 합해 400만원 정도를 부담해야 한다.

여기에다 아직 신장이식에 따른 경과를 봐야 하기 때문에 2, 3주 정도 더 입원해 있어야 해 병원비는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또 신장투석으로 울퉁불퉁해진 혈관을 정상으로 되돌리기 위한 수술 비용도 필요하다.

하지만, 박 씨 수중엔 모아둔 돈도, 도움을 줄 곳도 없는 상태다. 결혼을 하지 않아 아내도, 자녀도 없는데다 형제들과도 멀리 떨어져 있어 도움을 받을 길 없는 박 씨는 수술비를 혼자 다 감당해야 한다.

박 씨는 "아버지와 고인이 되신 친어머니, 네 형제가 오순도순 살던 어린 시절이 가장 행복했다"고 말했다. 신장이식으로 새 삶을 살 희망을 얻은 지금, 박 씨는 이 희망이 사라지지 않고 행복으로 이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있다.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을까 생각도 해 봤지만 죽을 용기조차 나지 않더군요. 이제 죽음을 생각할 필요 없이 새로운 삶을 살 희망이 생겼는데, 이 희망이 날아가지 않길 바랄 뿐입니다."

이화섭기자 lhsskf@msnet.co.kr

※이웃사랑 계좌는 '069-05-024143-008(대구은행), 700039-02-532604(우체국) ㈜매일신문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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