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꽉 막힌 대구, 컬러풀 덧칠… 파릇한 청춘들

옛 독서당 만권당서 모티브…다원 예술 네트워크 "저마다 색깍로 대구 채

'컬러풀 대구'(Colorful Daegu)의 청사진을 그리는 청년들이 있다. 도시 미관이 아니다. 일상 속 문화의 풍경을 다채로운 생각이 담긴 물감과 뜨거운 열정으로 쥔 붓으로 그린단다. 보수적인, 꽉 막힌, 그래서 변화가 없는 도시, 대구에 덧입혀진 편견과 오해의 색채를 벗겨 낼 힌트를 이들에게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만권당'을 아시나요?

'만권당'(萬卷堂)은 고려 충선왕이 고금의 진서들을 수집해 1314년 원나라 연경에 세운 독서당이다. 그런데 이곳은 평범한 서재가 아니었다. 백이정'이제현'박충좌 등 고려 학자들과 조맹우'염복'우집 등 원나라 학자들이 모여들어 당시 중국에서 유행하던 '성리학'을 연구했다. 만권당의 성리학은 고려 말 '삼은'(三隱)으로 불리는 이색'이숭인'정몽주에게 전수됐다. 이들이 기초를 다진 성리학은 조선의 건국이념이 됐다. 만권당은 조선의 탄생에 어떤 지적인 자극을 준 셈이다.

만권당이 역사에 다시 등장한 것은 1910년 대구에서다. 독립운동가 문영박은 문중 세거지가 있는 현재 달성군 화원읍 인흥마을에 만권당을 세웠다. 전국을 돌며 모은, 또 배로 중국에서 목포까지 실어온 책들을 채워 넣었다. 희귀한 책이 많아 전국에서 학자들이 모였다. 이들은 함께 책 읽고 토론했다. 일제강점하 때는 뜻있는 사람들끼리 모여 당시 제대로 정착되지 않았던 '민족' 개념에 대해 토론했고, 국채보상운동 등의 발판도 마련했다. 현재 만권당은 문영박의 손자 문태갑(84) 씨가 지킴이로 있다. 그도 할아버지처럼 수천 권의 책을 모았다. 현재 만권당은 2만 권의 책을 보유하고 있다.

만권당을 얘기할 때 장서의 양과 오랜 역사만큼이나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다. 책을 매개로 사람들이 모여 집단지성을 만들어냈고, 그러면서 역사와 문화를 만드는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힘이 나왔다는 것이다.

이달 8일 대구 수창동 예술발전소에 또 다른 만권당이 문을 연다. 만권당의 역사적 의미를 계승하는 것은 물론 떠들썩한 도서관을 추구하는 '라이브러리 2.0'의 개념을 녹여 넣을 계획이란다. 만권당을 기획한 문화기획자 조윤석(49) 씨와 대구 물레책방 대표 장우석(37) 씨를 만났다.

◆'만권만리' 공유하는 문화예술 플랫폼

조윤석 씨는 다양한 문화예술이 모이는 서울 홍대 앞에서 30년 넘게 거주하며 쌓은 문화기획의 경험을 펼쳐보이려고 최근 대구에 왔다. 그리고 지역에서 책방을 운영하며 독립영화감독 활동을 하던 장우석 씨가 힘을 합쳤다.

이들이 보기에 라이브러리 2.0은 새로운 개념이지만 사실 충선왕이 세웠던 만권당의 취지와 일맥상통한다. "기존 도서관은 나와 책이 1대1로 관계를 맺었습니다. 하지만 만권당은 책을 매개로 사람들이 어우러져 떠들썩하게 교류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또 책을 읽은 사람에서 책을 읽지 않은 사람으로 지식과 감성, 그리고 경험이 전달될 수도 있죠. 그러면서 도서관은 '죽은 책들의 무덤'이 아닌 '살아있는 지식의 보고'가 될 수 있습니다."

만권당은 '다원예술'의 공간도 마련할 계획이다. 지역 젊은 예술가 및 예비 예술가들에게 다양한 전시'공연 등의 기회를 마련해준다는 것. 여기에 시민과 예술가가 작업 경험을 공유하는 등 교류하는 프로그램도 마련할 예정이란다. 밖으로도 '문화예술도시 대구'를 알릴 예정이다. 만권당을 닮은 세계의 다양한 문화예술 공간과 교류하는 '예술가 수교' 형식의 네트워크를 준비하고 있단다.

최근 문태갑 씨를 만난 이들은 대화를 나누다 깜짝 놀랐다고 했다. 문 씨가 이미 30여 년 전에 자신들처럼 '문화예술 라이브러리'를 만들 계획을 했었다고 밝혔기 때문. 그래서 문 씨의 조언과 아이디어가 이번 만권당 기획에 적잖게 반영됐단다.

이들은 "다양한 문화와 예술을 담아내면서 만권당이 우리 지역을 활력 넘치는 문화예술도시로 이끌기를 바란다"고 했다. 조윤석 씨는 명나라 때 서예가 동기창이 말한 '독만권서 행만리로'(讀萬卷書 行萬里路)로 만권당의 취지를 소개했다. "좋은 예술가가 되려면 만 권의 책을 읽고, 만 리 길 여행을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고 보면 예술가란 시간과 공간에 얽매이지 않는 삶을 사회가 허락해 준 사람들이죠. 따라서 예술가는 살며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사회 구성원들에게 알려줘야 할 책무를 가집니다. 이는 우리가 예술가를 대할 때 가져야 할 인식이기도 하죠."

◆컬러풀 연주하는 음악, 디제잉(Djing)

공간을 컬러풀한 화음과 리듬으로 채우는 직업이 있다. '디제이'(DJ)이다. 다양한 장르와 분위기의 음악을 절묘한 손기술로 섞는다. 여러 개의 곡을 마치 하나의 곡인 것처럼 부드럽게 연결하는 것이 기본이다. 그러면서 특정 부분을 반복하거나 강조하는 등 재치도 녹여 넣는다. 만약 음악이 우리 눈에 보인다면 디제이가 음악을 트는 공간은 총천연색 빛깔로 가득할 것이다.

최근 디제잉을 배우려는 일반인들이 많아지고 있고, 젊은이들 사이에 파티 문화가 확산되면서 디제이를 찾는 수요도 늘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에 지난해 5월 대구 최초의 디제이 스쿨이 문을 열었다.

그 주인공은 신형섭(27) 씨다. 그는 'DJ FeelN!ne'(필구)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는 7년 경력의 디제이이다. 'DJ Heny'(헤니)라는 동료와 함께 대구 동성로에서 디제이 스쿨 '블록버스터즈'(Block Busterz)를 운영하고 있다.

현재 수강생은 30여 명 정도. 중학교 3학년 청소년부터 45세 회사원까지 연령층이 다양하다. "깜짝 놀랐죠. 30, 40대 아저씨들도 디제이 문화에 관심을 갖고 있어서요. 45세 회사원 분은 '결혼하고 직장에 다니며 정신없이 살다 이제야 시간이 좀 생겼다. 젊은 시절 포기했던 디제이의 꿈을 이제 이루고 싶다'며 찾아왔어요. 중학교 한문 선생님도 열심히 배우고 있습니다. 취미로 배우다 매력에 빠져 아예 직업으로 삼은 분들도 있고요."

그는 디제잉 선생님이면서 현장에서 뛰고 있는 현역 디제이이기도 하다. 클럽은 물론 도심과 대학가에서 개최하는 축제 등 가리지 않는다. 현재 대구 클럽가에서 활동하고 있는 디제이는 30~40명 정도. 그 외에도 프리랜서나 파티 전문으로 활동하는 디제이들이 대구에 눈에 띄게 늘고 있단다. 또 블록버스터즈 이후 두어 곳 디제이 스쿨이 대구에 문을 열었단다.

그는 "디제잉 수업이 지식과 기술의 전수를 넘어 '배움=즐김'의 가치를 체험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했다. "'배움이란 어렵고 지루한 것'이라는 인식을 없애는 데 디제잉이 한몫을 하면 좋겠습니다. 그러면서 '지루한 학습'이 아닌 '터놓고 즐김'으로 문화와 예술을 접하는 삶의 방식이 우리 지역에 널리 퍼졌으면 합니다."

◆컬러풀한 대구 풍경 담는 잡지

대구 최초의 스트리트 패션 잡지가 있다. 지난해 11월부터 발행되고 있는 '더 아이콘'이다. 매달 대구의 생생한 길거리 패션 트렌드를 전하는 것은 물론 음식'음악'놀이문화'볼거리 등 다양한 콘텐츠를 담는다. 취재'편집'인쇄'배포를 모두 도맡고 있는 김민서(28) 씨가 그 주인공.

대구는 섬유와 패션의 도시를 내세우지만 섬유에 비해 패션 분야는 좀 약하다는 얘기가 나온다. 섬유공장은 대구에 많지만 '메이드 인 대구' 패션 브랜드나 의상실은 아무래도 서울에 비하면 부족하다는 평가다. 하지만 취재를 위해 길거리에 나가보면 이전과 달라진 모습이 보인단다.

"손수 옷을 만들어 입는 학생들, 개성 있는 메이크업으로 외모를 꾸미는 젊은이들 등 길거리 패션 취재를 하다 보면 감탄사가 절로 나옵니다. 적어도 젊은이들은 '패션 대구'에서 살고 있어요. 하지만 안타깝기도 하죠. 학업과 취업 때문에 대구를 떠나는 친구들이 많으니까요."

그래서 대구에 남아 다양한 재능과 개성을 발휘하는 젊은이들을 발굴하는 취재에 주력한단다. "자체 디자인 패션이나 이색 조리법 등 재능을 발휘하고 있지만 주목받지 못하는 지역의 작은 옷가게나 음식점을 찾아 취재하고 있습니다. 또 보잘것없지만 자기 분야에서 꿈을 이루려 노력하는 지역 젊은이들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가 인터뷰를 해요. 모두가 저마다 가진 '작은' 색깔로 대구를 채우고 있는 사람들이죠. 크고 화려하고 유명해야만 '컬러풀'인 건 아니잖아요?"

황희진기자 hhj@msnet.co.kr

사진'성일권기자 sungi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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