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는 매달 2, 7일로 끝나는 날이 장날이다. 때마침 장날이라 문경에서 넘어오는 길에 상주 중앙시장에 들렀다. 오후 늦게 도착했지만 설을 앞둔 대목장이라 그런지 장터는 인파로 북적였다. 좌판에도 조기나 강정, 건어물, 문어 등 차례용품이 대부분이다. 역시 쌀을 튀겨 강정을 만드는 뻥튀기 기계 앞에는 줄이 길다. 카메라 셔터를 차라락 눌러대자 일제히 시선이 쏠렸다. "어디서 왔어요? 나도 찍어줘요. 유명인사 되는 거 아이가?" 까르르 웃음이 터졌다.
반가운 대목장 풍경이지만 상인들의 표정은 그리 밝진 않았다. "아이고, 작년보다 손님이 훨씬 줄었어요. 손님들도 70, 80대 노인이 대부분이라. 젊은 사람들은 다들 대형마트로 가니까. 농협도 문제라요. 조합원들한테 하나로마트 상품권을 내주거든. 그럼 사람들이 시장에 안 오고 다들 하나로마트로 가요." 20년 동안 중앙시장에서 장사를 했다는 상인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 "전통시장이 언제까지 갈런 참…." 대한민국 어디를 가야 대형마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상인들의 땅이 꺼져라 내뱉는 한숨 소리가 귓전에 맴돌았다.
◆곶감 1번지, 상주시 외남면
상주에서 운행하는 모든 시내'시외버스는 모두 상주버스종합터미널로 모인다. 이곳에 오면 상주 시내를 오가는 모든 버스를 탈 수 있다. 주변에는 식당이나 숙박시설도 많다.
오전 8시 10분 상주버스종합터미널에서 '상주-옥산'(외남'송지)행 버스를 탔다. 20분 정도 달리면 외남면 소은리 버스정류장이다. 외남면은 상주시내에서도 곶감 주산지로 유명한 지역이다. 외남면은 800여 농가들이 매년 곶감 2천여 동(1동은 곶감 100접)을 생산한다.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마을 안으로 500m가량 들어오면 750년 수령의 '하늘 아래 첫 감나무'가 있고, 소은1리 마을회관에서 왼쪽 길로 접어들면 곶감테마파크를 만날 수 있다. 곶감테마파크는 2011년 구전동화인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곶감'을 스토리텔링하여 조성한 공원이다. 공원 곳곳에는 호랑이와 감 조형물과 구전동화를 그림으로 표현한 이야기벽이 설치돼 있다. 공원 주변은 온통 감나무 밭이다. 한겨울 감나무는 앙상한 빈 가지만 남아 있다. 늦가을이었더라면 주황빛 감이 주렁주렁 열린 풍경을 볼 수 있었을 터다.
곶감테마파크를 감싸고 있는 할미산을 일주하는 '할미산 곶감길' 코스도 걸어볼 만하다. 곶감공원에서 할미고개~할미산성~할미산~할미샘을 거쳐 돌아오는 4.2㎞ 코스다. 외남면 소은리에서도 '송골'은 곶감공원의 중심이다. 750년 수령의 '하늘 아래 첫 감나무' 덕분이다. 이 나무에서 나는 감으로 만든 곶감이 조선 예종(1450~1469) 때 진상됐다는 기록까지 남아있다. 이 감나무에서 열린 감으로 만든 1천여 개의 곶감은 백화점에 개당 1만원씩 납품되는 것으로 유명하다.
◆할머니가 전하는 감나무 이야기
마을 농가마다 감을 말리는 덕장을 갖추고 있지만 지금은 거의 비어 있다. 요즘은 말린 곶감을 저장고에 두고 출하하는 시기라고 했다. 마을 입구에 선 칠백오십살을 먹은 감나무는 작고 다부진 촌로 같았다. 여느 감나무보다 크지도 않고, 가지가 화려하게 뻗어나지도 않았다. 나무 밑동은 썩어 속을 시멘트로 채웠지만 가지는 살아 열매를 맺는다.
'하늘 아래 첫 감나무'는 엄연히 주인이 있는 나무다. 주인은 개천 건너 '쪼매난 농원'에 산다. 군데군데 녹이 슨 녹색 철문은 열려 있었다. TV 소리는 나는데 한참을 불러도 대답이 없다. 막 돌아서는데 방문이 열렸다. 최옥용(94) 할머니다.
할머니는 낯선 손님을 따끈한 온기가 남아있는 전기장판으로 들여 앉혔다. 할머니의 오른쪽 눈에 반창고가 붙어 있다. 40년 전 종양으로 눈을 잃고 외눈으로 살고 있다. "아들이 병원으로 억지로 데려 가지 않았으면 벌써 죽었지." 최 할머니는 자식 자랑부터 내놨다. "우리 자식들이 얼마나 효자인지 모른다고. 그렇게 부모를 챙긴다고."
'하늘 아래 첫 감나무'는 4대째 내려온 나무다. "내가 열여덟에 시집올 때부터 나무가 저래 둘로 돼 있었어. 시어른이 그 밭에 집을 지어가지고 살다가 지금 사는 집으로 이사왔지요."
할머니는 감을 싸리나무 꼬챙이에 끼워 분이 허옇게 날 때까지 말렸다고 했다. 감을 거적으로 싸놨다가 아침저녁으로 조금씩 펴서 말려냈다. "서리맞으라고 하는 거지. 그렇게 몇 번을 해야 분이 잘나요. 식전으로 녹여서 싸고 다시 분내고. 그렇게 매달아 놓고 또 황을 피워 먹이지요. 황을 씌우면 감이 시커멓게 변하질 않거든."
곶감은 바람과 볕에 사람의 기운을 더해 두 달을 견뎌야 한다. 기계로 말리면 당도도 떨어지고 끝맛도 떫다. 주름도 많이 진다. "감나무는 어린나무는 곶감이 적고 맛이 안 나요. 감은 고목에서 자란 것일수록 좋아요. 더 달고 차지고."
한참 자식 자랑을 하던 할머니가 감말랭이를 꺼내 "먹어보라"며 건넸다. 어린 감이나 흠이 난 감을 다듬어 감말랭이를 만들고, 채반에 그것을 펴서 맑은 볕에 말린다. 조금은 덜 마른 감 조각이 달디단 맛을 내며 척척 붙었다. 손님의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할머니가 주섬주섬 감을 큰 봉지에 양껏 싸서 건넸다. "아이고 할머니, 너무 많아요." 몇 번이나 손사래를 치자 작은 봉지에 담아 "다니면서 먹으라"며 건넨다.
"저 감나무는 내 벗이라. 심심하믄 거 가서 감나무 한번 쳐다보는 게 낙이라. 가면 감나무헌테 이캐. 니가 출세를 해서 서울서 관광버스를 맞춰가지고 이래 니를 보러 오네. 내도 니 때문에 호강한다. 니 때문에 이렇게 사람들이 와서 내를 들따보고 그란다. 눈먼 새도 안 볼낀데…" 할머니는 오늘도 유모차 모양의 보행기를 밀며 감나무로 힘겹게 걸음을 옮겼다.
◆속리산 자락에 묻혀
오전 11시 15분 소은리에서 버스를 타고 상주종합버스터미널로 돌아왔다. 어디로 갈까 궁리하다 화북면으로 가기로 했다. 화북면은 상주에서도 외곽이고, 충북 괴산군 청천면과 맞닿아 있다. 오후 1시 10분 화북면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상오리까지는 1시간 10분이 걸린다. 상주는 전국에서 귀농귀촌 인구가 가장 많은 지역이다. 버스 창밖으로 유럽풍 주택을 어렵잖게 볼 수 있다. 하지만 주변 풍경과는 이질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귀농귀촌에서 가장 어려운 점이 마을 공동체에 섞이는 일이라는데 집부터 저렇게 튀어서야 될까 싶다.
상오리 앞 버스정류장에서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10분 정도면 마을로 들어가면 장각폭포가 있다. 속리산의 최고봉인 천황봉에서 시작된 물줄기가 흘러내려 마을 앞 절벽에서 물줄기를 떨어뜨리는 곳이다. 폭포와 노송, 정자가 어우러져 시원한 조화를 이룬다. 영상으로 오른 기온에 녹은 얼음물이 시원스레 물보라를 일으킨다.
2㎞가량을 속리산 방향으로 걸어 들어가면 상오리칠층석탑(보물 제683호)을 만난다. 철제 계단을 오르면 밭 가운데에 황톳빛 화강암으로 만든 석탑이 우뚝 모습을 드러낸다. 군데군데 기단이 부서지고 받침대도 무너졌다. 안내판도 색이 바래 글씨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서글픈 문화재 관리의 현실인 듯하다.
되돌아 나와 버스정류장으로 오면 상오리 솔숲이 있다. 계곡을 따라 산책로가 이어지고, 야영장 데크가 곳곳에 설치돼 있다.
산책로를 따라 2.5㎞를 걸으면 화북중학교다. 물소리를 들으며 산책을 하다가 벤치에서 잠시 숨을 돌렸다. 화북면을 지나쳐 길을 따라가면 용유리다. 길목에는 속리산 시비공원이 있다. 밭과 산, 언덕 위에 간간이 시비탑이 만들어져 있다. 시비 반대편에는 낙동강 수계의 시발점인 용유계곡이다. 계곡을 더 따라가면 문경시 농암면 내서리 쌍용계곡으로 이어진다. 화북면에서 상주로 돌아오는 버스는 하루 7편 운행한다.
글'사진 장성현기자 jackso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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