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죄가 따로 없구나/ 못난 놈 낳으시고/ 어머니께서 드신 미역 값은 하는지/ 나만 믿고 졸졸 따르는 병아리 같은 자식놈들께 자신 없고/ 당신 없으면 못 산다는 속고 사는 아내에게,/ 모두에게 죄짓고 사니/ 생일날 아침엔 왠지 쑥스럽고 미안하다/ 입속에 씹히는 미역 한 줄기에도 쑥스럽고/ 출근길 밟히는 잡풀 하나에도 미안하다.'(구광렬의 시 '생일날 아침')
미역국 하면 출산과 생일로 바로 연결된다. 아기 낳고 미역국 안 먹는 여인이 없고 생일상에 미역국이 오르지 않는 법이 없다. 옛날 내 고향 금호강의 중림공굴 다리 밑에 살았던 거지 내외도 아기를 낳으면 깡통 속에 모아 두었던 동냥 돈으로 미역 한 오리를 사서 산모에게 끓여 먹인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다.
미역은 피를 맑게 하면서 지속적인 조혈작용으로 산모의 부기를 제거한다. 칼륨과 요오드 성분이 신진대사를 활발하게 하여 모유를 잘 나오게 한다. 미역이 이렇게 좋은데도 서양 사람들은 다섯 쌍둥이를 낳고도 미역국을 끓여 먹었다는 기록을 보지 못했다.
나는 미역을 좋아한다. 젊은 시절 강이나 바다에서 투망질을 하거나 낚시를 할 때 현장에서 밥을 지을 경우 안주 겸 반찬으로 미역무침을 직접 만들었다. 미역을 풀고 마른 명태를 찢어 고추장과 고춧가루로 양념을 한 후 다진 마늘과 깨소금을 뿌리면 다른 반찬이 없어도 거뜬하게 한 끼를 때울 수 있었다.
요즘도 섬이나 갯마을 여행 중에 미역 건조장을 만나면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그런데 문제는 인근에 양식재배를 하는 지역에선 자연산 미역을 찾을 수가 없고 여행객들의 내왕이 빈번한 항구의 건어물 가게에서도 질 좋은 미역은 구할 수가 없다.
포장지에 '무슨 특산 돌미역'이라고 쓴 글귀를 믿었다간 백전백패를 각오해야 한다. 이름난 섬과 항구는 어디든 마찬가지다. 그래서 우리 집에는 미역국을 끓이면 '풀떼죽'처럼 풀어지는 특산 돌미역이 구석구석에 숨어 있다. 나는 "다시는 미역을 사오지 않겠다"고 맹세하지만 만날 타박을 당하면서도 그게 잘 안 된다.
'원죄가 따로 없구나/ 못난 놈 낳으시고/ 어머니께서 드신 미역 값은 하는지/ 나만 믿고 졸졸 따르는 병아리 같은 자식놈들께 자신 없고/ 당신 없으면 못 산다는 속고 사는 아내에게,/ 모두에게 죄짓고 사니/ 생일날 아침엔 왠지 쑥스럽고 미안하다/ 입속에 씹히는 미역 한 줄기에도 쑥스럽고/ 출근길 밟히는 잡풀 하나에도 미안하다.'(구광렬의 시 '생일날 아침')
최근 비진도엘 갔다가 겉으로 보면 볼품은 없어도 맛은 그럴듯한 자연산 미역 한 움큼을 단돈 1만원에 샀다. 내 인생에서 미역에 관한 한 최초의 성공 기록인 셈이다. 아내와 나는 전문 트레킹 팀을 따라 비진도로 들어가 외항마을 산호길을 돌아 내항마을 선착장으로 돌아오니 배를 타기까지 1시간 30분이란 여유가 생겼다.
이날 바다에는 풍랑이 치고 해변에는 모랫바람이 불어 몸을 숨길 곳이 없었다. 우린 내항마을에서 단 하나뿐인 구멍가게에 들어가 라면박스로 술상을 차리고 오징어땅콩이란 과자를 안주로 막걸리를 마셨다. 워낙 먹을 게 없어 주인(박장명'67)에게 "어르신께서 잡수시던 김치라도 안주하게 좀 주세요"라고 했더니 엄청 짜게 담근 김장김치 한 보시기를 내 주셨다. 나는 김치를 건네주면서 부끄러워하던 주인의 마음씨가 너무 고마웠다.
마침 큰 비닐 보자기 속에 상품 가치가 없어 보이는 묵은 미역이 있길래 "이것도 파는 겁니까"하고 물어보았다. "팔다 남은 건데 아무도 사가는 사람이 없어요"란 대답이 돌아왔다. 사실 미역의 때깔은 말이 아니었다. 원래 미역의 색깔은 검어야 하는데 이건 숫제 붉고 희고 총천연색이었다. 그래도 내가 우겨 그냥 돈 만 원을 드린다고 생각하고 아내에게 그걸 사도록 했다.
이곳 내항마을 사람들은 모두 너무 순박해 보였다. 해풍 맞은 시금치를 팔던 할머니는 "나는 저울 눈금을 잘 볼 줄 몰러, 알아서 달아 봐"하며 앉은뱅이 저울을 사는 이들에게 내맡기는 그런 곳이다.
귀가한 다음 날 아침 미역의 안부가 궁금했다. 미역을 맑은 간장에 찍어 먹을 요량으로 물에 불렸더니 일급 자연산 미역으로 변모하는 것이었다. 다음날은 오랜만에 미역국을 끓여보니 풀어지기는커녕 빳빳한 원래의 모습이 흐트러지지 않았다. 대성공이었다. 풍랑이 불 때 바다 속에서 밀려나온 미역들이 갯가 바위에 붙었다가 이곳 비진도 아낙들에게 수거된 진짜 자연산이었다.
비진도 미역국을 먹다가 음력 설날 태어나 한 번도 미역국 생일상을 받아본 적이 없는 불우하게 살다 타계한 천상병 시인의 '생일 없는 놈'이란 시가 생각났다. 천국으로 가는 택배가 있으면 비진도 미역 몇 오리를 시인의 부인 목순옥 여사 앞으로 보내고 싶다.
수필가 9hwal@hanmail.net
댓글 많은 뉴스
나경원 "李 장남 결혼, 비공개라며 계좌는 왜?…위선·기만"
이 대통령 지지율 58.6%…부정 평가 34.2%
트럼프 조기 귀국에 한미 정상회담 불발…"美측서 양해"
김기현 "'문재인의 남자' 탁현민, 국회직 임명 철회해야"
李대통령, 남아공 대통령·호주 총리와 정상회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