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메디시티 대구 의료 100년] 제2부-근대 의료의 도입 <2>초기 제중원서 생긴 일들

파란 눈의 의사 말 통하는 선교사 불러 환자 마취 지시하며 수술

존슨이 들고 있는 나뭇가지가 환자의 몸에서 나온 것. 가느다란 가지 끝에는 솜뭉치가 감겨져 있다. 옛날 사람들은 밥 먹는 것이 체해서 넘어가지 않을 때 이 막대기를 목에 넣고 쑤셨다고 한다. 아마도 가지가 부러져 위 안에까지 들어갔던 모양이다. 1900년 무렵 사진. 동산의료원 제공
존슨이 들고 있는 나뭇가지가 환자의 몸에서 나온 것. 가느다란 가지 끝에는 솜뭉치가 감겨져 있다. 옛날 사람들은 밥 먹는 것이 체해서 넘어가지 않을 때 이 막대기를 목에 넣고 쑤셨다고 한다. 아마도 가지가 부러져 위 안에까지 들어갔던 모양이다. 1900년 무렵 사진. 동산의료원 제공

제중원을 세운 의사 존슨의 의술은 놀라웠다. 내과, 외과, 산부인과, 안과뿐 아니라 치과 치료까지 도맡았다. 현재 시각에서 보면 결코 최고의 의술은 아니었으라. 하지만 당시로선 최선의 치료를 했고, 그 때문에 존슨과 제중원의 명성도 자자해졌다. 썩은 이를 뽑는 일이나 예방접종은 대부분 진료소 앞의 좁은 현관에서 이뤄졌다. 그때까지 경북에는 알려져 있지 않던 천연두 예방접종의 효과와 저렴한 비용(10전)이 소문나면서 가난한 집 아이들도 부담없이 주사를 맞으러 왔다고 한다.

◆수술로 이름을 알린 의사 존슨

의사 존슨이 제중원을 열기 두 달쯤 전인 1899년 10월에 헨리 브루언 선교사가 대구선교지회에 가세했다. 제중원을 열었지만 의사도 한 명뿐이고 정규 교육을 받은 간호인력은 전무한 상황이었다. 의료 교육을 받은 적이 없던 브루언 선교사도 존슨의 수술을 도울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의사소통이 가능해서 이것저것 도움을 청할 수 있었기 때문이리라.

어느 날 아담스 목사(처음 대구선교지회를 만든 베어드 목사의 뒤를 이어 부임한 책임자)는 시골에서 입술이 퉁퉁 부은 환자를 데려왔다. 환자는 입술이 너무 많이 붓다 보니 거의 입이 닫힌 상태였다. 식구들은 젓가락으로 작은 구멍을 통해 밥알을 밀어 넣어 주었고, 물은 볏짚 빨대로 삼키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거의 굶어서 죽을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수술을 결심한 존슨은 브루언을 불러 마취를 부탁했다. 깜짝 놀란 브루언은 손사래를 치며 "그런 일을 할 줄 모릅니다"라며 거절했다. 존슨은 자기가 시키는 대로 해달라고 부탁했다.

브루언은 주저하지 않고 존슨의 지시대로 마취를 했고, 수술 중에 환자의 의식이 돌아올 기미가 보일 때마다 마스크를 다시 씌워 환자를 잠들게 했다. 존슨은 브루언의 긴장을 풀어주려는 듯 수술용 칼을 손에 잡은 채 농담을 걸었다. "브루언, 이 환자에게 어떤 입 모양을 만들어줄까요? 야옹이처럼 입술 끝을 올려줄까요, 아니면 불독처럼 내려줄까요?" 수술은 성공했고, 얼마 뒤 환자는 밥을 먹고 말을 하며, 웃을 수 있게 됐다. 소문이 퍼져 존슨과 제중원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돌팔이 때문에 고생한 환자들

존슨이 치료한 환자들은 다양했다. 1909~1910년 만난 환자들 중 특이한 사례에 대한 기록이 그의 의료보고서에 남아있다. 부유한 상인으로 알려져 있던 이 참봉의 늑막염을 치료한 기록도 있다. 7년간 병을 앓던 이 참봉을 병원에 데려온 사람은 친구들이었다. 친구들은 이 참봉이 너무 쇠약하기 때문에 기구 치료(수술) 대신 약으로만 치료해 줄 것을 요구했다. 기구를 사용해야 한다는 말에 환자를 집에 데려갔가다 통증이 너무 심해 다시 병원에 왔고, 결국 수술 후 완치됐다.

존슨은 백내장 탓에 두 눈이 완전히 먼 상태로 입원한 65세 환자도 수술로 고쳤다. 어느 날 아침 예배시간에 수술을 받은 할머니가 부축해 주는 사람도 없이 혼자 예배실로 걸어 들어왔고, 18세 아들도 예수를 믿겠다고 했다.

제대로 된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해 병을 키운 환자도 부지기수였다. 당시만 해도 질병에 대한 상식이 터무니없이 부족하던 시절이었다. 이 때문에 사기꾼이나 다름없는 돌팔이들이 환자를 치료한답시고 돈을 뜯어내기도 했다.

존슨이 남긴 기록 중 일부를 살펴보자. '대구에 폐결핵을 전문으로 고친다는 여자 돌팔이가 있었다. 그녀는 환자의 머리나 등뼈를 마사지한 뒤 족집게를 가지고 1인치(2.54㎝) 정도 되는 가늘고 하얀 실 같은 뼈를 뽑아내는 체했다. 이 돌팔이 의사는 대구교회 김 장로 부인에게 이렇게 해서 많은 뼈를 뽑았다고 한다. 김 장로는 이 여자를 사기꾼이라고 말하면서도 아내가 죽을 지경에 처해 있으므로 어쩔 수 없이 그녀에게 공손히 대했다. 여자는 김 장로 부인에게 남편이 옆에 있으면 뼈를 빼낼 수가 없으며, 미국 의사가 처방해주는 약을 계속 복용하면 뽑아낼 뼈를 쉽게 찾을 수 있다고 했다. 김 장로는 여자 돌팔이가 뽑았다고 하는 뼈를 몇 개 가지고 왔다. 현미경으로 조사해 본 결과, 그것은 한국산 청어의 지느러미 뼈로 판명됐다.'

◆나환자 치료도 시작

존슨의 기록에는 박춘실이라는 환자 이야기도 나온다. 환자는 처음 한쪽 발에 가벼운 염증이 생겨 한의원을 찾았다. 의원은 나병(한센병)으로 불리는 풍병의 시작이라며 쑥뜸 치료를 했다. 상처는 얼른 낫지 않았고, 나병에 걸릴 것을 두려워한 환자는 더 크고 넓게 쑥뜸을 떴다. 결국 병원에 왔을 때 상처가 커져서 무릎 아래를 절단해야 할 정도로 중환자가 돼 있었다. 다행히 제중원에 입원 치료를 받으면서 다리는 서서히 회복됐고, 환자는 나병에 걸리지 않았다며 기뻐했다고 한다.

당시 나병은 하늘이 내리는 형벌로 여겼다. 특히 경상도에는 유난히 나환자가 많았다고 전해진다. 1908년 어느 날 젊은 스님이 제중원을 찾아왔다. 손가락과 발가락이 다 떨어져 나간 중증 나환자였다. 환자는 병을 고쳐줄 수 없으면 차라리 죽여달라고 호소했다. 이때가 존슨과 나환자의 첫 만남이었다. 이후 제중원은 나병도 치료해준다는 소문이 퍼졌고, 많은 나환자들이 끊임없이 찾았다. 존슨은 이듬해인 1909년 어느 날 병원 근처에 초가집 한 채를 마련하고, 나환자 10명을 수용해 간호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훗날 애락원으로 불리게 된 '나환자 요양원'의 출발점이었고, 본격적인 나환자 치료의 시작이었다.

1909년 6월 27일 자 대구 선교지 보고서는 의사 존슨이 제왕절개 수술에 성공했다는 내용이 나와있다. '존슨은 지난주 부인의 도움을 받아 첫 번째 제왕절개 수술을 했다. 이 수술의 성공으로 산모와 아기의 생명을 건졌다. 이 수술법은 존슨의 명성을 더욱 높였다.' 하지만 존슨의 제왕절개 수술로도 아기의 목숨을 살리지 못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이것은 출산 후에 자궁이 아래로 빠지는 '자궁탈출증'을 치료한답시고 자궁에 질산을 바르거나 뜨거운 인두나 기왓장으로 자궁을 지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자궁이 막혀서 자연분만이 불가능해진다. 결국 이런 산모가 제중원을 찾았을 때엔 대개 태아가 이미 죽은 상태였다. 진통제조차 없는 이런 상황에서도 놀라운 숫자의 신생아가 태어났다고 한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감수=의료사특별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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