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김 하나 없이 빳빳한 몸으로 차례를 기다렸다. "착! 착!" 전우들은 차진 마찰음을 내며 날렵한 속도로 하나 둘 출격했다.
어디선가 들은 우리의 일생은 이렇다. 공수부대의 벼락같은 강하 작전처럼 상대의 손에 착지한다. 상대는 손에 들려진 내게 곧장 관심을 나타낸다. 걸려들었다. 내 몸에 새긴 촌철살인의 메시지와 화려한 비주얼이 상대의 눈을 붙잡고, 마음을 빼앗는다. 상대는 나를 호주머니에서 몇 번이고 넣었다 꺼내고, 또 접었다 펴 본다. 그러다 끝내는 내가 하라는 대로 전화를 걸고, 약도를 따라 찾아온다는 것.
◆찌라시 특공대의 최후
드디어 출격 명령이 떨어졌다. "착!" 곧장 누군가의 손에 들려졌다. 착지는 성공이다. 가늘고 작은 손가락, 하얗고 보드라운 살결. 내 말을 순순히 따를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제 상대의 눈을 마주한 다음 마음을 빼앗을 차례. 어떤 순진한 표정을 지을지 궁금해졌다. 그 순간.
"받기 싫다고 그랬잖아요!" 앙칼진 목소리와 함께 내 몸은 시멘트 바닥에 그대로 내동댕이쳐졌다. 곧장 행인들이 내 몸에 아무렇게나 발자국을 찍어댔다. 이따금 쏟아지는 가래침 폭격에 내 몸은 흥건하게 젖었다. 너덜거리는 나는 정신을 잃고 길 바깥 으슥한 골목으로 점점 쓸려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정신을 차리니 하늘은 까맸고, 길바닥 위에는 나처럼 참혹하게 구겨지고 찢어진 전우들이 아무렇게 나뒹굴고 있었다. 저 멀리 녹색 조끼를 입은 아저씨가 우리를 쓸어 담으러 오고 있었다. 최후를 직감했다. 그랬다. 밤새 뿌려진 '찌라시'들은 채 하루도 살지 못하고 새벽녘이면 저세상으로 가기를 반복한다.
◆밤거리 뒤덮는 '유흥업소 찌라시'
'불금'(불타는 금요일)이면 대구 도심 밤거리를 컬러풀하게 수놓는 것이 있다. 네온사인? 젊은이들의 패션? 또 있다. 시선을 좀 더 아래로 향해보자. 길바닥 가득 깔린 유흥업소 찌라시다.
이달 15일 오후 8시쯤 대구 동성로 로데오거리. 한 무리의 청년들이 나타나 길 위에 섰다. 이들은 행인들을 붙잡고 명함을 나눠주기 시작했다. 또 다른 청년들은 A4 용지 절반 크기의 전단지를 길에다 마구 뿌리기 시작했다. 행인 대부분은 받은 명함을 곧장 길에다 버렸다. 1시간쯤 지나니 길바닥은 명함과 전단지 등 찌라시로 도배되다시피 했다.
찌라시를 뿌린 청년들은 인근 나이트클럽 등 유흥업소에서 나온 웨이터 등 종사자들이었다. 손님이 본격적으로 업소를 찾는 오후 10~11시가 되기 전에 집중적으로 '물량공세 홍보전'을 펼치러 왔단다. 실제로 기자가 1시간 동안 로데오거리와 클럽골목을 돌면서 30여 종류의 웨이터 명함을 주울 수 있을 정도였다.
이들은 각자 이름과 연락처가 적힌 명함을 뿌린다. 함께 곁들이는 문구는 '유머형'이 대세다. 웨이터 하정우는 실제 영화배우 하정우의 유행어인 '살아있네!'를 패러디한 '살아있는 부킹!'을 명함에 새겼다. '부킹 잘하는 법' 설명을 담은 '정보형'도 찾을 수 있었다.
뜨는 스타는 곧장 웨이터 이름이 된다. 싸이, 송중기, 유재석 등이 눈에 띄었다. 어느 지역에 가도 길거리에서 명함을 받을 수 있는 웨이터 이름의 고전은 '돼지엄마'다. 이름의 유래는 '새끼를 줄줄이 달고 다니는 어미돼지처럼 부킹녀들을 줄줄이 데리고 온다'는 설이 있다.
최근 나타난 것으로 '남성 도우미' 찌라시도 주울 수 있었다. 말 그대로다. 적힌 전화번호로 연락하면 남성 도우미를 보내준다.
유흥업소 종사자들은 생업을 위해 찌라시를 뿌리고, 행인들도 부담 없이 받아 들고는 웃고 버리지만, 환경미화원들은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한 환경미화원은 "최근 동성로에서 흡연단속을 하면서 담배꽁초는 줄었다. 하지만 유흥업소 찌라시는 이전과 다름없다. 유흥업소 차원에서 수거라도 해주면 좋겠다"고 하소연했다.
◆심리전 무기 '삐라'
이쯤에서 '찌라시'의 어원이 궁금해진다. '광고나 선동하는 글을 담은 종이'라는 뜻의 일본어다. 비슷한 일본어가 하나 더 있다. '삐라'다. 삐라는 한국전쟁 때 대량으로 출몰했다. 당시 남과 북은 약 28억 장의 심리전단을 한반도에 뿌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삐라는 2차 세계대전 때부터 전쟁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요소로 각광받기 시작했다. 미국 존스홉킨스대 작전연구소 조사에 따르면 한국전쟁 다시 포로들이 항복한 이유는 33.1%가 '심리전'의 영향으로 나타났다. 당시 하늘에서 눈처럼 뿌려대는 삐라는 심리전에서 승리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무기였다.
이후 삐라는 '북한이 남한에 뿌리는 전단'으로 의미가 굳어졌다. 그런데 실은 북한은 물론 남한도 전쟁이 끝난 후 서로 삐라를 투척하며 휴전 속 심리전을 펼쳤다. 이는 최근까지 이어졌다. 우리 군은 2011년까지 모두 800만 장의 삐라를 북으로 날려 보냈다. 내용은 처음에는 '탈북 유혹'이었던 것이 최근에는 '북한 3대 세습 반대' 등 체제에 대한 정면 비판으로 바뀌었다. 북한은 배용준, 이승연 등 시기마다 가장 인기 있는 남한 연예인 사진을 무단 도용한 다음 '김정일 장군 만만세!' 등의 문구를 넣은 삐라를 남측에 뿌렸다. 실은 남한도 수영복 차림의 여성 연예인 사진을 담은 삐라를 북측에 뿌리기도 했다.
◆경기침체 장기화에 판치는 '대출 찌라시'
찌라시는 이제 일상 속 '판촉전'에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다. 종이로 된 매체가 점점 퇴출되는 디지털 시대라지만 찌라시는 조금 예외다.
19일 오후 북구 산격동 한 상가지역. 2명이 탑승한 커다란 오토바이가 나타났다. 거리를 달리며 양쪽으로 명함형 찌라시를 '발사'했다. 앞에 탄 사람은 운전을 했고, 뒤에 탄 사람이 던졌다. 한 번에 2장씩 던졌고, 200m 거리에 있는 20여 곳 가게들 중 단 한 곳도 빼놓지 않았다.
던져진 명함은 보통 가게 유리문에 맞고 튕겨나가 문 앞에 아무렇게 쌓였다. 그런데 일부 명함은 문틈에 끼이거나 문 밑을 통과해 가게 안으로까지 들어오는 등 발사 실력이 혀를 내두르게 만들었다. 확인해보니 대부분 '일수' 등 대출업체의 찌라시였고, '스마트폰 매입' 찌라시도 있었다.
중구 한 판촉물 제작업체에 따르면 이러한 명함형 찌라시는 날리기 좋게 일반 명함과 달리 두꺼운 종이를 쓴다. 또, 길바닥에 떨어져 누군가 줍기 전까지 최대한 오래 버텨야 하기 때문에 내구성 및 방수성을 높인 재질을 선호한다는 것.
대출업체의 주요 판촉 타깃이 되는 소상공인들은 하루에 몇 번씩 유리문을 '퉁퉁' 두드리는 명함형 찌라시가 불쾌하다. 미용실을 운영하는 장모(34'여) 씨는 "가게 입구를 수시로 청소해야 하는 것은 물론 유리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적잖게 거슬린다. 하지만 나가서 따지려 해도 이미 오토바이는 지나간 뒤이고, 혹시나 험악한(?) 사람들일까 싶어 무섭기도 하다"고 말했다.
옥외광고물법에 따르면 사채 사용 등을 부추기는 전단의 경우 법률에서 필수 기재 사항으로 정한 사업체 이름(대표자), 등록번호, 이자율 및 연체 이자율, 영업소 주소 및 전화번호를 반드시 표시해야 한다. 하지만 이날 주운 대출 찌라시 대부분에는 필수 기재사항이 몇 개씩 빠져 있었다. 어떤 찌라시에는 아예 '무단 배포하여 죄송합니다'라며 불법을 시인하는 문구가 적혀 있기도 했다.
◆찌라시의 일상사
사실 찌라시는 주택가에 많이 붙었다. 오래전부터 붙이고 떼며 이런저런 시시비비가 붙었다. 1983년 12월 3일 방송된 MBC '폭소대작전'에서 스티커형 찌라시를 집 담장과 대문에 붙이려는 선전원과 떼려는 집주인 간의 다툼을 콩트로 그렸을 정도다. 이 콩트에서는 열쇠, 수도수리, 이삿짐센터, 파출부, 피아노교습소 등 당시 스티커형 찌라시를 주로 배포하던 업종을 열거했다.
집 담장이나 대문에 '지우기 힘든 상처'를 남기던 찌라시는 조금씩 개선되기 시작했다. 철문 등에 붙일 수 있도록 자석을 부착하거나 접착력이 약한 테이프를 부착한 찌라시가 등장한 것.
찌라시를 배포하는 측도 점차 수거 대책을 마련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예를 들면 유동인구가 많은 횡단보도 앞에서 사람들이 횡단보도를 건너기 전 찌라시를 나눠 주고, 찌라시가 필요치 않은 사람들은 즉각 버릴 수 있도록 건너편에 쓰레기통을 마련해두는 식이다.
다른 찌라시와 달리 사람들의 지탄을 조금 피해가는 찌라시도 있다. 치킨, 피자, 중국집, 족발 등 간식'야식 업소 관련 찌라시다. 대학생 박근형(25'대구 북구 산격동) 씨는 "동네마다 간식'야식 업소를 한데 모은 책자를 찍어 수백에서 수천 부씩 배포하고 있는데 주문 전화번호가 가득 적혀 있어 곁에 두면 편한 '전화번호부형' 찌라시다"고 말했다.
황희진기자 hhj@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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