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안상학의 시와 함께] 나무 아래 와서

나무 아래 와서

배창환(1956~)

이윽고, 참을 수 없이 노오란 은행잎들이 퍼붓던 날, 그대는 가고, 지나가던 바람이 내 귀를 열어 속삭였지요.

-이제부터 너는 혼자가 아닐 거야.

그건 놀라운 예언이었던가 봅니다. 그날 이후 나는, 새벽 이슬, 초승달, 몇 개의 풀꽃, 뜬구름, 작은 시내 같은 것들에 매달려 있었고, 그 안에서 숨 쉬며 말 배우는 기쁨에 살았었지요.

다시 노오란 은행잎들이 퍼붓던 날, 그 나무 아래 와서, 그대를 내게 보내고 다시 거두어가 버린 당신의 크낙한 마음을 읽고는 처음으로 펑펑 울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슬픔 많은 이 땅의 시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시집 『겨울 가야산』(실천문학사, 2006)

상처란 무엇인가. 권정생 선생은 어린 시절에 청소부 아버지가 주워온 짝짝이 장화를 멋도 모르고 신은 채 동무들 앞에 나섰다가 큰 놀림을 받았다. 그 일이 두고두고 상처로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나이가 들어 어느 날 장화 한 켤레를 사서 방안에서 신고 한껏 기분을 냈다. 그러나 이내 시무룩해지고 말았다. 상처를 받은 것은 소년 권정생이었지 어른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 소년에게 장화를 신겨줄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장화를 신고 으스대며 '원수를 갚을' 동무들도 이미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상처는 어린 시절 깨진 무릎처럼 멀쩡해져 있는데 마음만 애면글면 붙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일 이후 그 상처의 고통은 마음에서 물러났다고 한다.

이 시는 이별을 하고나서야 비로소 "혼자가 아닐 거"라는 예언을 깨달아 가는 과정이 아로새겨져 있다. 사물과 대화를 하며 이별의 상처를 풀어낼 줄 알게 된 시인의 운명이 곡진하다. 상처들을 치유하고 아픔에서 벗어나는 그 버릇은 어느새 개인을 넘어 "슬픔 많은 이 땅"으로 확장된다. 시는 낮은 곳을 찾아가는 물처럼 세상의 상처로 흘러가는 눈물의 마음이다. 장화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다. 시의 소임이며 시인의 운명이다.

시인 artando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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